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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향유기]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 위클리홍콩 2024-10-18 02:57:18

작가: 시원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는 왕가위 감독의 작품인 <해피 투게더>를 촬영하며 있었던 비하인드, 삭제된 장면, 본편에 사용되지 않은 설정들을 한 편의 영상으로 모아둔 다큐멘터리다. <해피투게더>에서 연인이었던 아휘(양조위 분)에게 보영(장국영 분)이 ‘우리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건넨 순간부터 분기되어 어쩌면 본편의 주된 내용이 될 수도 있었던 아휘와 보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볼 수 있어 본편인 <해피투게더>를 아끼는 이들에게는 마치 선물처럼 느껴질 소중한 작품이다.

 

넌 아휘야. 난 하보영이고. – 아휘와 보영의 또 다른 이야기

 

보영은 사실 아휘를 무척이나 사랑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그에게 버려질까 두려운 듯 애처롭게 그의 얼굴을 몰래 살피고, 집착하는 아휘에 질려 대판 싸운 후 미련 없다는 듯 떠나지만 결국 아휘에게 돌아간다. 진정 아휘를 사랑해선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사실이 좋은 건진 몰라도 겉으론 보영이 가벼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보영은 더 이상 아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제 변덕에 지쳐 자신을 떠날까 초조해하나 제 분에 못 이겨 항상 등 돌려 아휘를 떠나고 만다. 여느 때처럼 보영이 아휘를 떠나던 밤, 아휘는 떠나는 보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왜 항상 자신이 남겨져야 하는지, 떠나는 사람은 항상 보영이어야만 하는지 물음을 던지며 자신도 떠날 거란 암시를 남긴다.

 

아휘는 보영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떠나는 보영의 뒷모습을 보며 끝을 내리라 다짐하고, 그를 지우려 애쓰지만 다시 보영이 돌아와 매달리면 외면하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마음은 금세 허물어진다.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거나 홍콩으로 돌아가면 될 일인데, 아휘는 보영이 그의 마음을 난도질해도 있던 자리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남겨진 그 자리에서 아휘는 과도로 손목을 긋는다.

 

본편에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아휘를 사랑하여 보영의 질투를 유발하는 인물인 간호사가 아휘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이송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끝내 아휘는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보영이 여권을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아휘가 살던 방에 돌아가지만, 아휘가 떠난 후 그 방에서 살게 된 간호사만 있을 뿐 아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아휘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줄 알고 한껏 질투하던 보영은 부인이 전하는 아휘의 죽음을 듣고 무너진다. 

 

‘내 이름 기억나? 넌 아휘야. 난 하보영이고. 왜 여권을 안 돌려주는지 알아? 네 이름을 평생 간직하고 싶었어. 내 이름을 써도 돼. 그럼 하보영이란 이름을 절대 잊지 못하겠지—.’(극중 아휘의 대사)

 

아휘는 죽어서도 보영을 잊지 못해 그와 함께한 시간 속에 영원히 남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로소 생을 마감함으로써 미련을 훌훌 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반면 보영은 어떨까. 하보영이란 이름을 잊지 못할 거라며 자조한 건 아휘지만, 정작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을 후회하며 평생 그의 이름을 가슴 속에 묻고 살아갈 사람은 보영이지 않을까. 아휘를 잃은 보영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밤이 되면 겨울처럼 한기가 몰아치는 그 먼 타지에서 목적도 원하는 것도 없이 홀로 남겨져 그저 살지도 모른다. 고향에도, 아휘에게도 돌아가지 못한 채로.



<해피투게더>는 삶의 어떤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마침표 –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우리 다시 시작하자.’라는 보영의 대사에서 많은 이야기와 인물들이 추가되고 확장됐지만, 결국 <해피투게더>에서 아휘가 열차를 타고 제자리에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에 방점이 찍힌다. 아휘를 사랑했던 간호사와 ‘셜리’의 이야기, 어쩌면 아휘에게 보영의 존재로 남았을지 모르는 ‘장’의 추가적인 이야기, 그리고 아휘와 보영의 또 다른 결말이 될 수 있었던 이야기까지. 여러 인물과 이야기를 한참이나 지나오고 나서야 하나의 이야기로 마무리 지어졌다. 감독은 <해피투게더>가 삶의 어떤 시기가 끝났음을 마치는 마침표로,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달력이 있으며 작품을 함께 만든 사람들에게 분수령이 되었다고 말한다. 비로소 집으로 아휘가 돌아가고, 열차가 역에 멈춰 서며 한 이야기가 닫히지만 작품을 만든 이들의 이야기는 새롭게 운을 뗀다. <해피투게더>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나아가 이 작품을 더욱 사랑하고 싶다면,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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