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2호, 8월26일]
작은 발의 아름다움 - 전족
가끔 채널을 돌리다 보면, 중국 사극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데, 그..
[제92호, 8월26일]
작은 발의 아름다움 - 전족
가끔 채널을 돌리다 보면, 중국 사극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데, 그들의 머리 위에 얹은 주렁주렁한 나비모양의 가체도 눈에 띄지만, 몸에 비해 작디작은 그들의 신발크기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정상적으로 성장한 발이라면 그리 작을 수 없음에, 그리고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의 발이 유난히 작음에 의문이 간다. 오늘은 그들의 "작은 발 문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 10cm의 아름다움?
중국 송 시대, 한 마을에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하고, 엄마 품으로, 아빠 품으로 안기는 아주 예쁠 4세. 그때까지가 이 여자아이로서는 발 바닥전체로 땅을 딛는 마지막 경험이다. 여기저기 호기심 많고 다닐 곳 많은, 하고 싶은 놀이도 많은 5세부터 그 여자아이의 발은 천으로 동동 싸매지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 발의 발은 고작 7cm인데, 무엇을 쌀 것이 있다고 그 아이의 엄마는 모질게도 여자아이의 발을 동여맨다. 나즈막한 의자에 앉은 여자아이는 평소와는 다른 엄마의 엄한 모습에 울음을 터뜨렸지만, 아이의 발을 자신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발을 무명천으로 싸매는 엄마의 표정에는 한낮 흐트러짐이 없다. 천천히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네 발가락을 발바닥 한 가운데로 접고, 그렇게 해서 한번 동여맨다. 그리고 발바닥 바깥쪽의 뼈를 또 안으로 접어 또 한번 천을 두른다. 뒤에서 딸아이의 어깨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그의 아빠는 가슴으로 눈물을 머금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마음이 수백 번 들었지만, 알고 보면 이 모든 게 다 딸아이를 위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큰 발은 얼굴의 곰보자국보다도 천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5세부터 발을 동여맨 그 여자아이는 어느덧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예쁘게 머리에 치장을 하고 붉은 예복을 입고 대기하고 있다. 앳된 어릴 적 모습이 남아있긴 하지만, 수줍은 두 볼 하며, 여성스러운 자태는 그 어미를 쏙 빼닮은 듯 하다.
신랑이 입장하고, 이제 신부가 입장할 시간. 신부를 양쪽에서 부축하는 들러리가 매우 힘겨워 보인다. 신부가 아주 천천히 조신하게 입장을 하는데, 하객들은 모두 신부의 조그만 발에 부러움의 탄성을 지른다. 그녀의 발사이즈는 고작 10cm.
▶ 몸은 40세, 발은 6세
위에 언급한 짧은 스토리는 "중국의 작은 발 문화"를 모르는 이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수 있다. 본인이 가상의 현실로 꾸며 쓴 이야기이긴 하지만, 물론 이러한 상황이 중국에서는 엄연히 존재하였다. 몸은 크지만 발은 클 수 없었던 그녀들의 고통. 한간의 소문에 의하면 "작은 발 한 쌍을 가지려면 한 항아리의 눈물을 쏟아야 한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으니….
가끔 오지의 탐험에서 나오는 "목에 쇠고리를 몇 십 개 걸치는 소수민족, 아랫입술에 머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을 내는 민족"을 정말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들었지, 우리와 가까운 중국에서 이러한 충격적인 문화가 있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이러한 참혹한 시달림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전족문화"를 왜 고수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제부터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자.
▶ 연꽃 같은 발자국 - “전족”
"전족"은 둘둘 감다 "전(纏)" + 발 "족(足)"이라는 한자를 쓴다. 이 한자에서도 바로 알다시피, "전족"이라함은 발을 동여매 성장을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4~5세에 동여매기 시작해서 평생을 그렇게 작은 발로 살게 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감 보다는 이에 동반하는 뼈를 깎는 고통이 더 클 터인데, 어찌하여 그녀들은 전족을 하게 되었는가. 현대식 고층건물이 들어선 지금보다는 고대시절이 더욱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던 당시 중국의 배경을 보면, 전족의 유래를 대충은 눈치챌 수 있다.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네 발가락을 모두 발 중앙으로 접고, 발 바깥쪽 뼈를 세로로 접어 발 중앙으로 접으면, 발등이 봉긋해지면서 뾰족한 발 모양이 된다. 이 모양은 사슴의 발을 닮았다 하고, 이렇게 바닥을 걸으면 그 발자국 모양이 마치 "연꽃이 떨어져 흩날리는 모양"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이에 고대시절의 중국은 '발'을 일컬어 "금련(金蓮)"이라고도 하였는데, 여기서의 련(蓮)이 이 연꽃을 지칭한다.
이러한 고상하고 사치스러운 유행은 부유층을 시작으로 점점 하층민까지 전해 내려져, 모두들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실낱같은 희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 "전족"은 '남자'를 위한 것이었다 ?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이해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 고통스럽고 불편한 "전족"이 어떠한 연유로, 어떠한 원동력으로 하층민에게까지 보편화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냥 단순한 "부유층 생활"을 상징하는 의미로는 사실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을 이어온 문화유지의 힘을 잘 설명할 수 없다. 바로 그 뒤에는 중국인들의 "에로티시즘"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족"을 한 여자는 물론 걷기도 힘들다. 그래서 그런지 다소 뒤뚱뒤뚱 볼품없는 모양으로 걷게 되는데, 그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겠지만 당시에는 그 걸음걸이가 매우 섹시한 것이었다 한다. 발이 불편하니, 하체의 움직임이 동시에 크게 되는데, 그 뒷모습이 남자로 하여금 묘~한 느낌을 주었다는 것. 게다가 당시에는 작고, 가냘프고, 뾰족하고, 향기로움이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전족"이 여성성을 어필할 만한 좋은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스러운 "전족"은 여성들이 즐기기엔 그 고통이 너무 컸다. 포기도 하고 싶고, 내 자식들 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지만, 바로 그 시대의 남성우월주의가 그녀들을 채찍질 했다. '걷지 못해도 좋으니 발을 작게만 만들라'는 남자들의 외침은 여자들을 하나의 가축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으며, 성노리개 감으로 밖에 평가되지 않음에 씁쓸함을 금치 못한다. 지금의 중국과는 달리 당시의 남성은 분명 여자 위에 존재했다.
그러나 "전족문화"를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당시의 문화의 일종인 "전족"을 지나치게 性에만 집중시켜 해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전족"도 기나 긴 중국역사의 한 단면을 차지하고 있고, 그 단면을 통해서 당시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다소 충격적이기는 한 "전족"문화를 "문화적 상대주의"적 안목으로 봐주었으면 하는 것이 오늘 "중국 엿보기"의 가장 큰 준비물인 것이다.
* 위클리홍콩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12-0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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