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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별세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8-06-05 15: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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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4호, 6월 6일]   20세기 패션의 아이콘 가운데 한명인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1일 오후 11시 10분..
[제224호, 6월 6일]

  20세기 패션의 아이콘 가운데 한명인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1일 오후 11시 10분(현지시간)에 파리에서 별세했다고 피에르 베르제 생 로랑 재단 관계자들이 밝혔다.  향년 71세.

  관계자들은 생 로랑이 오랫동안 지병을 앓고 있었다고 전했지만 직접적인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생 로랑은 크리스티앙 디오르, 코코 샤넬과 함께 프랑스를 세계 패션산업의 중심
지로 만드는데 기여한 디자이너들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2001년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생 로랑은 패션에 대해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은 아니지만, 예술가가 필요한 분야"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1936년 8월 1일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난 생 로랑은 소년기에 부끄러움을 잘 타고 사교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일찍부터 의상 디자인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17세 때인 1953년에는 그의 디자인이 담긴 스케치북을 들고 파리로 이주했는데, 패션잡지 '보그'의 미젤 드 브뤼노프 편집장에게 발탁되면서 패션계로 진출했다.

  이후 생 로랑은 드 브뤼노프 편집장의 추천으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의상실에서 일하면서 패션계에서 날개를 펴기 시작했고, 1957년 디오르가 사망한 뒤에는 디오르 의상실을 이끌기도 했다.

  평소 디오르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했던 생 로랑은 "그가 나에게 예술의 기초를 가르쳤다"며 "그와 함께 일했던 시간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추억한 바 있다.

  수많은 프랑스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생 로랑에게도 알제리 전쟁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알제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징집영장을 받은 생 로랑은 전장에 나간지 3주만에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미 디오르 의상실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뒤였다.

  결국 생 로랑은 평생의 동반자가 된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1960년대 초에 '이브 생 로랑' 의상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생 로랑은 자신의 의상 디자인 개념을 "의상의 완전한 침묵"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인체와 의류 사이의 조화로 규정했다.

  당대를 뒤흔든 팝 문화와 청년 및 여성의 구매력 증가 등에 힘입어 이브 생 로랑의 모노그램 로고는 불과 10년여만에 전세계 패션 시장의 판도를 장악할 수 있었으며,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 같은 '고정 팬'들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또 생 로랑은 의류에 국한되지 않고 향수나 장신구 등으로도 사업 영역을 넓혔으며, 1970년대에만 해도 유럽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소한 시장이던 한국과 일본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 로랑의 사업이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1년에 내놓은 일부 의상들은 전쟁을 미화한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고, '오피움'이라는 이름의 향수는 마약 사용을 미화했다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실제로 생 로랑은 말년에 "안정제와 마약류라는 나쁜 친구들"과 가까이 했음을
시인하기도 했다.

  대담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라크루아는 생 로랑에 대해 다른 동시대 디자이너들과 달리 다양성을 겸비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라크루아는 생 로랑이 "샤넬의 형식, 디오르의 풍부함, 그리고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위트를 겸비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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