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6호]
내 체력의 한계
로이다가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계약을 맺은 에드나가 우리 집..
[제56호]
내 체력의 한계
로이다가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계약을 맺은 에드나가 우리 집에 오려면 적어도 2주는 더 기다려야 했다. 할 수 없이 서울에 계신 시어머니께 도움을 청했다. 어머니가 도착한 다음날 로이다는 떠나기로 돼 있었다.
화요일 밤부터 시작된 신문 교정 작업은 수요일 새벽이 돼서야 끝이 났다. 글이란 것이 술술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이리저리 꼬일 때도 있다. 이런 글은 머리가 말끔히 정리되지 않으면 풀어내기가 보통 고약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무리 풀어내도 엉키고 또 엉켜지고, 고쳐도 고쳐도 맘에 들지 않아 그 날도 새벽까지 씨름을 했고, 이런 날은 편집인도 나와 상태가 비슷해서 끝없는 실수를 같이 하고 있기 마련이다. 일이 어찌 끝났는 줄 모르고 집에 돌아와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날은 서울서 어머니가 오시는 날이었다. 몇 시간만 자고 일어나면 어머니가 오셔서 나는 당분간 좀 편해질 수 있을 터였다.
그날 새벽 로이다가 노크를 쾅쾅 해대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서울 어머니로부터의 전화였다. 어머니가 못 오시게 됐단다. 공항에 도착해 보니 여권기간 만료가 가깝다며 체크인이 안 된다는 것이다. 큰일이다. 로이다는 내일 떠나야 하는데 어머니는 못 오신단다. 그 와중에 아이들 학교 갈 시간은 가까워 오는데 로이다는 아침부터 제대로 하는 것 하나도 없이 실수만 해대고 있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화가 났다. 서너 시간 밖에 못잔 내 몸 상태는 엉망이었고, 어머니는 못 오시고, 메이드는 아침부터 그 특유의 갑갑함으로 나를 열 받게 하고, 아이들 도시락 싸랴, 먹지 않겠다는 아침밥 먹이랴...
학교버스를 태워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서진이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배가 살살 아파왔다. 아픈 강도가 급작스럽게 강해지기 시작했다. 참느라 식은땀이 흘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나는 서진이 에게 미안하지만 혼자서 버스타고 가라고 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25층에서 모든 층을 다 서며 아주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그렇게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그만 까마득히 정신을 잃었다.
비상사태
깨져나가는 듯한 머리의 아픔을 느끼며 눈을 떠보니 내가 아파트 현관에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지 이유를 몰라 머리를 만져보니 피가 흥건히 묻어져 나왔다. 쓰러지면서 현관 모서리에 머리가 찍혔던 모양이다. 모빌폰과 안경이 저 만큼 나가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가 안경을 주워 써보니 내 앞에 펼쳐진 상황은 장난이 아니었다. 평소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아저씨가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고, 관리실에서는 사람들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완전 비상사태였다. 이들의 부축을 받고 기억을 더듬어 집으로 갔다. 너무 어지러워 거실에 누웠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우리 집인 것은 같은데 낯설었고,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이번 주 신문은 마쳤는지, 남편은 어디 갔는지, 아이들은 학교에 갔는지... 기억들이 명료하지 않고 가물가물했다. 오늘 아침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내는데 꽤나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꼭 20여전의 기억들을 더듬는 느낌 이었다.
이런 나를 두고 로이다가 물었다.
"맘, 잘 기억이 안나요?"
"음... 잘 안나... 할머니는 온댔는데 왔니?"
"아뇨 맘. 못온다고 했잖아요 맘. 그런데요 맘. 나는 기억해요"
나는 그 와중에도 웃음이 푹 하고 나왔다. 암, 암, 우리의 로이다를 기억 못하면 쓰나. 당연히 기억하고도 남지. 그리고 장난을 치며 “그래, 너 넬리잖아” 했더니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벌어지더니 큰일났다며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잠시 후 로이다의 전화를 받은 남편이 회사에서 급히 돌아왔다. 내 머리 상태를 보더니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당장 병원으로 가잖다. 나는 내 상태도 잘 모르면서 잠시 후면 괜찮아 질 거라며 병원엘 안가겠다고 우겼다. 사실 나는 그다지 큰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은 막무가내로 나를 부축하여 우리가 주로 가는 Evangel Hospital 사립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놀라서 나도 놀랬다. 내가 어떻기에 사람들이 이 난린가? 의사는 정밀검사를 해봐야 한다며 누여진 드럼세탁기 같은 곳에 나를 집어넣고 머리를 스캔 했다. 엑스레이를 보면서 의사는 천만 다행이라고, 머리가 무척 깊이 패였는데 다행히 살이 가장 많은 머리 윗부분이 찍혀 뼈까지는 미치지 않았다고, 또 만약 머리가 이렇게 모서리에 찍히지 않고 땅바닥에 꽈당하고 부딪혔으면 뇌진탕이 일어났을 건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나이트메어의 주인공이 되어
의사와 간호사는 곧바로 꿰매는 작업에 들어갔다. 마취주사는 놨지만 실과 바늘이 들어가고 나오고 이리저리 당겨지는 느낌이 통증과 함께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한 바늘 꿰매는데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다. 의사는 네 바늘 꿰매더니 피가 너무 많이 넘쳐 나오고, 상처가 너무 깊어 자기네로서는 더 이상 진행을 하지 못하니 정부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도대체 내 머리가 어떠하기에 이러나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정부병원으로 갔는데 아, 그곳엔 변함없이 야전병원을 방불케 하는 환자들이 이리저리 누워있었다. 사립병원에서 아주 긴급환자라며, 꿰매다 만 환자가 갔으니 급히 처리를 해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보다 더 급한 환자들 뒤로 밀려나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정부병원 의사들은 대단했다. 사립병원 의사들이 덜덜 떨며 포기한 부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뚝딱뚝딱 꿰매는 일을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피가 엄청 쏟아져 나왔다. 의사는 열 네 바늘을 꿰맸는데 원하면 화장실에 가서 얼굴에 묻은 피만 좀 씻고 오라고 했다. 내가 복도로 나가니 남편의 입이 또 벌어졌다. 내 모습이 처참했던 모양이다. 뭐 남편뿐 아니라 복도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는 나이트메어를 본 양 얼굴들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도대체 내가 어쩌기에....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의사가 머리를 꿰맨다고 긴 머리를 쑥딱쑥딱 잘라냈는데 그 머리카락들과 내 머리가 피로 엉겨 붙어 난리가 나 있었고, 내 얼굴 한 옆은 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사립병원 같으면 이런 것들도 깨끗이 다 씻어 내줄텐데 정부병원엔 이런 사사로운 일을 거둘 간호사들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의사는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지금은 괜찮지만 혹시 토하기라도 하고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면 수술 들어가야 하니 입원해 있으라 했다. 하루 종일 입원해 있는 동안 다행으로 별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20여 년 전으로 느껴지던 기억들이 10 여 년 전 기억으로 가까워 졌다. 조금만 더 크게 다쳤으면 영영 기억들을 다 잃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잊고 싶은 기억도 많은데 그런 기억만 잊혀져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들이 이젠 되려 더 나를 아프게 해 되려 내게 상처가 되는, 또 누가 나를 아프게 해서 가슴에 박혀있는... 그런 것들은 그냥 잊혀져도 좋을 만도 한데 그런 것들 먼저 선연한 색깔을 띠며 제자리를 잡았다.
애진교회 만다린 수업
앞은 어질어질 하고, 기억은 가물가물 했지만 저녁에 무사히 퇴원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서진영 선생님이 하는 애진교회 만다린 수업이 생각났다. 내일이 바로 첫 강의 시간이었다. 로사 체면이 있지 첫 강의부터 빠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가. 남편더러 내일 만다린 수업이 있어 가겠다고 하니 정신 못 차린다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다음날 남편이 출근한 후 모자를 눌러쓰고 애진교회로 향했다. 아직도 앞이 어른거리는데다 애진교회는 초행길이었다. 침사초이 살람도 근처라는데 찾기가 꽤나 어렵게 느껴졌다. 혼 날 각오를 하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뜸 호통이 날아왔다. 왜 안 누워있고 나와서 돌아다니느냐고....
"자기야, 나한테 소리 지르면 뇌에 더 충격이 와서 어지러워, 그러니 살살 말해봐 응?"
"나 참 기막혀. 그래도 그렇지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
"아냐, 나 힘이 없어서 빨리 거기 가서 앉아 있어야 돼, 빨리 말해줘 봐"
"이그그.... 내가 못 살아 증말...."
/ 계속......
<글 : 로사>
* 위클리홍콩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12-0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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