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I 한인사회 발전기 (1981-1993)
2. 각종 단체 조직 발기
1979년 국내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사건으로 긴박한 정치 상황이었지만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이 실권자가 되어 1979년부터 문호개방 정책을 펼쳤으므로 중국과 외교 관계가 없었던 우리나라 회사들이 홍콩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중국과의 거래 등을 추진하기 위하여 많은 한국의 회사들이 홍콩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한 기간이었다.
그리하여 한인사회에서도 각종 분야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1981년 7월 홍콩한국요식업자협의회가 발족하였고, 1982년 1월에는 홍콩한국백화점협의회가 발족, 동년 3월에는 홍콩 한국여행사협의회가 발족, 1983년 10월 10일에는 홍콩 서울올림픽 후원회가 발족, 1984년 5월에는 홍콩 한인체육회의 발족이 있었고 가맹단체로는 태권도, 테니스, 축구, 골프 등이었다.
1984년 10월 3일 제1회 홍콩한인체육대회를 개최하여 교민들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하였다. 1984년에 홍콩 현지인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 위하여 제1회 한국어반을 개강하였고, 1988년 3월에는 대한민국 문교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아 홍콩한국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문화, 체육 각종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한 기간이었다.
3. 세계 진출의 발판이 된 홍콩 태권도계
5"16 군사정변 이후 최초로 한국 태권도 협회가 만들어져 합동 (오도관) 으로 사범단을 구성, 동남아순회로 한국 무술을 알리면서 김복만, 한차교 사범으로 하여금 홍콩을 기반으로 하여 동남아에 첫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두 사범의 눈부신 노력과 동남아 각국의 좋은 반응으로 성광용, 봉석권, 천재영, 이종우, 정선영, 이선수, 이평팔 사범 등이 홍콩을 거쳐 세계 각국으로 초청 파견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브루스 리 (이소룡)”의 무술 영화가 등장, 인기를 독차지하여 태권도의 전성기가 되었고 영화 출연차 이관영, 황인식, 이준구, 황정리, 김진팔(합기도) 등 많은 사범, 무술인들이 세계 곳곳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또한 월남전에서 우리 국군의 활동으로 한국 사람은 누구나 태권도를 한다는 인식을 세계인의 가슴에 심어주기도 하였다.
1969년 한차교, 승강용 사범은 영사관 직원과 함께“간첩 이수근”을 홍콩 공항에서 검거하는 데 직접 협조하였으나 홍콩법에 위반된다고 하여 며칠 수감된 뒤 미국 CIA의 도움을 받아 석방된 일도 있었다.
1971년에 장성봉, 이종오 사범 등이 YMCA 태권도부를 창설하였고, 이평팔 사범은 Shek Kong 군인부대에 태권도부를 창설 지도하였고, 1976년에 진출한 곽재영 사범은 이평팔 사범의 뒤를 이어 홍콩 내 군부대, 학교 등 25개의 도장을 경영하면서 홍콩태권도협회와 군인협회의 기술 고문으로 재직한 바 있고, 88년에 호주로 이주했다. 특히 곽재영 사범은 천재영 사범의 뒤를 이어 여름 방학 때마다 한인회 강당에서 아동들에게 무료로 태권도를 지도하였고, 교포 자녀 태권도 시범단을 구성하여 홍콩 TV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 뒤 홍순경, 신재균, 우재범, 김종호 사범들이 활약하였고, 1978년 김복만, 곽재영, 장성봉, 신재균 사범들이 홍콩 태권도 협회가 주최한“제3회 아시아 태권도대회”(25개 국가 참가)를 성대히 개최, 운영하는데 주동 역할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현지인 제자 중의 고단자가 사범을 대신하는 제도로 현지화되였으나 2019년 현재 김종호, 문명곤, 우종필, 조영득, 노래, 고태형 등 한국인 사범들이 홍콩에서 대략 16개의 도장을 운영하면서 태권도 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홍콩한인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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