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I 한인 사회 중흥기 (1971-1980)
1. 코리아센터 시대
본국 정부의 수출 제일주의 정책으로 1960년 말에서 1970년대에 많은 한국 상사들이 홍콩에 진출하였다.
1968년 주 홍콩총영사관의 한국 상품 직매장 설치 운영을 통한 동남아 수출 전초기지로서 역할 증대를 위한 Korea Centre 설치 건의에 따라 한국무역협회는 1969년 5월 19일 제5차 수출진흥 확대 회의에서 이를 검토, 수출진흥 특별회계기금으로 홍콩에 코리아센터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69년 6월에 현지 공관장의 추천으로 건축 중이던 건물 (현 Korea Centre)을 무역협회 부회장이 내향하여 매입 계약함으로써 Korea Centre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원표 씨 (전 홍콩한인회장) 는 무역협회 “홍콩연락사무소장”을 위촉받아 협회 일을 돕고 있어 코리아센터 시대의 산증인이다. 코리아센터 설립은 한국 상사 진출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홍콩에서 한국인 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결국, 60년대에 들어와서 우리나라가 경제 개발을 시작하면서 ‘68~70년대에 주재 상사들이 많이 진출하였고 또 지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자영업을 하는 분들도 많아져 한인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70년대 초 코리아센터로 19개 상사가 진출하였으며, 서준석, 이내건, 황은수, 이재현, 장규찬 씨 등이 있다. 당시 코리아센터는 그야말로 한국 상사들의 집결지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구매하게 된 코리아센터는 일부 백화점식 운영이 시도되기도 하였으나 직매 상품의 다양성 부족, 직매 경험 미숙 및 직매장 위치 여건 불리 등 운영이 여의치 않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곧 폐쇄되었고 건물 관리와 임대 사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코리아센터는 진출 상사의 교두보로서 많은 상사가 기틀을 잡고 자리를 굳히는데 디딤돌이 되었다.
2. 대중국교역의 교두보로서의 홍콩
1969년 말 모국 정부의 무역 진흥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회관 마련은 1970년 3월에 완공되어 인수받음으로써 코리아센터를 세우고 1970년 11월 19일 코리아센터로 교민회 사무실과 한국학원이 이전함으로부터 교민회의 코리아센터 시대가 시작되었다.
1992년 우리나라가 중국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이전까지 홍콩은 대중국 교역의 중요한 교두보로서 무역, 금융, 해운 등 많은 거래가 홍콩을 중개지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중국과의 인적 교류가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홍콩을 통하여 대부분의 중국 거래가 이루어졌다. 한국인으로 처음 중국을 방문한 것은 오래전부터 이곳에 와 있던 전복기 회원이 홍콩 ID로 중국을 다녀왔고, 1971년 임태근, 최도원씨가 중국을 방문하였다. 그 후 많은 상사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중국에 입국하여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 거래하였다.
홍콩에서 처음으로 장철영 씨가 셋방여행사를, 박인식 씨가 항공사 대리점을, 임정업 씨가 만나식당을, 모텔업은 1976년에 윤석한 씨가, 관광여행업은 홍순원 씨와 한승식 씨가 시작하였다. 1972년 8월 조선호텔 기획부장으로 구룡 머린 호텔(Merlin Hotel)에 지배인으로 스카우트되어 온 권원식 사장(Parkview Group 대회)은 홍콩 호텔업에 진출한 첫 한국인으로 많은 활동을 보여 호텔업계에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겠다.
3. 자매결연
교민회는 1973년에 충남 천원군 상거면 삼곡리와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2차에 걸쳐 돼지 50여 마리와 경로당을 신축하여 기증하는 등 고국의 어려운 일을 돕기도 하였다.
<홍콩한인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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