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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서 걷는 길 (1) 홍콩한인여성회 & 위클리홍콩 주최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13-11-01 03:00:59
  • 수정 2013-11-01 03: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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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회 한글사랑 글짓기 공모전 대상作
한지수


“Good morning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captain speaking...”
이제 막 출발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 것이 얼마만인지.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둘러 나온 터라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들으니 이내 피곤함이 몰려 왔다. 승무원에게 안대와 귀마개를 빌려 눈 감고 귀 막고 잠을 청했다.
잠시 쉬고 있던 나를 깨운 건 승무원의 목소리와 음식 냄새였다.
“손님, 저희가 준비한 오늘의 메뉴는 채소를 곁들인 닭고기 요리, 미트볼 스파게티, 그리고 죽이 있습니다.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나 보다. 몇 일 동안 야근에, 출장 준비에, 피곤해서 그런지 속이 좋지 않았다.
“죽 주세요.”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음료는 무엇으로 준비할까요?”
“그냥, 물이면 좋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승무원이 건네준 죽을 뜯었다. 김 가루를 뿌려 휘휘 저으니 연한 초록빛이 되었다. 죽과 함께 준비된 오이 초절임을 한입 먹으니 좋지 않던 속이 좀 풀리는 듯 느껴졌다. 죽을 단숨에 먹고 난 후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아버지께서는 홍콩에서 근무를 하신지 2년 정도 됐을 즈음에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했다. 우회전 신호를 받고 우회전을 하다가 마주 오던 트럭이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다 아버지 차와 부딪쳤다. 트럭 운전자는 가벼운 상처뿐이었지만, 아버지 차를 운전 하던 운전기사는 병원에 옮기던 중에 숨을 거두었고 아버지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하였다. 교통사고로 인해 우리 가정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아버지는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았다. 육체적인 장애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어 했던 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홍콩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은 그냥 중산층의 보통가정이었다. 금융계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자녀들의 교육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어머니 밑에서 나와 여동생 둘은 조용히 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튀지도 않고, 뒤떨어지지도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학교생활을 했다. 홍콩으로 가기 전엔 한국에서는 열성교육으로 유명한 동네인 대치동에 살았다. 집이 아버지의 회사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버지는 불편하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좋은 중학교를 배정 받아야 한다며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사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원하는 중학교에 배정을 받았을 때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한지 두 달 만에 홍콩으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홍콩에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으셨고, 우리는 전폭적인 회사의 지원으로 무사히 홍콩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어머니가 홍콩오기 전에 미리 알아보았다는 국제학교에 인터뷰를 하고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아침부터 오후 내내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지만 높은 학비를 내가며 자녀 셋을 국제학교에 보내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런 불평은 사치였다.

다행히도 여동생들은 성격이 밝고 붙임성이 좋아 학교에 빨리 적응을 했다. 그렇지만 동생들과 달리 나는 시간이 갈수록 수업에 흥미를 잃어 가고 있었다. 동생들은 학교에 다녀오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저녁식사 시간까지 둘이서 재잘재잘 댔다. 나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말할 게 별로 없었다. 학교생활은 나에겐 독방에 갇혀 있는 감옥 생활과 같았다.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며 과제물 발표를 시킬 때면, 친구들 앞에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싫어서 목이 아픈 것처럼 콜록 콜록 거리거나, 가방에서 물을 꺼내어 계속 마시곤 했다.

그나마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수학문제를 풀 때는 말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나눠주시는 과제물을 단숨에 풀어버리고 답을 맞추기 전까지 남는 시간에 나는 과제물에 나와 있는 문제를 가지고 조금씩 변형을 시켜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보는 것을 좋아했다.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선생님께 물어 보지 않고 인터넷을 뒤지거나 다른 책을 찾아보면 쉽게 풀렸다. 그렇게 홍콩에서 2년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친구들과, 세상과 벽을 쌓아 가고 있었다. 견고히 만들어진 나만의 성을 위하여.

한국에 돌아와서 어머니는 비록 두 달만 다녔던 중학교였지만, 전에 다니던 학교에 들어가야 교육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며 그 학교로 전학을 준비했다. 예전에 살았던 대치동 아파트에 다시 들어갈 형편이 되지 않아 우리 가족은 학교 근처에 있는 다세대 주택의 지층에서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모든 것이 갑작스레 바뀌었고, 마치 하루 만에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에 들어와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이런 달라진 가정 형편이지만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던 것은 화장실에서 몰래 흘리는 어머니의 눈물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아버지 옆에서 함께 계시며 아버지의 다리가 되어 줬다. 오후에는 우리 가족들 저녁상을 차려 놓고 식당에 가서 일을 했다. 밤늦게 까지 일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중학생인 내가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 남매 앞에서 힘든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 그저 자녀 셋을 모두 좋은 학교에 보내, 보란 듯이 잘 키우겠다는 결심만이 어머니를 지키는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중학교 3학년으로 다시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이 시작 되었다. 한국말로 공부하는 게 좋았지만, 홍콩에서부터 이미 쌓아 뒀던 세상과의 높은 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홍콩에서도 한국에서도 난 외톨이였다. 아이들도 그런 날 가만 지켜보는 듯 했다. 단 한명, 동호라는 녀석만 빼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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