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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표 이천쌀> 홍콩 진출기념 '제1회 홍콩한인글짓기 대회' 은상 作 - 고향의 여름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11-08-04 12:44:15
  • 수정 2011-08-11 12: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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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5호, 8월5일
고향의 여름
임미숙


5월 초, 산과 바다가 거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옆 동으로 이사했다. 높은 곳을 싫어하는 나는 60층 아파트의 12층에 산다. 한 달 쯤 지났을까 컴컴한 창 밖으로 몸의 한 귀퉁이가 빛이 나는 곤충이 있었는데 분명 반딧불이였다고 남편이 말했다. '반·딧·불·이' 얼마나 오랜만에 입가에 올려보는 이름인가? 작년 여름에는 MTR이 옆으로 지나가는 산책로에서 돌아오는데 주유소 옆 샛길로 뱀이 튀어나와 나를 가로막는 일도 있었다. 어린 시절 뱀과 반딧불이는 나의 동네 친구였다.

나의 고향은 전라북도 김제이다. 교과서에 벽골제, 금산사 등의 역사장소와 함께 등장하고 최근에는 '지평선 축제' 로 제법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크고 작은 마을이 들판 중간 중간에 있고 한 여름엔 푸른색이 광활한 대지를 점령하는 호남평야의 100가구 정도가 품앗이를 해가며 벼농사를 짓는 곳이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없어서 몇 몇 초등학교를 통합하고서도 폐교 될 수 있다는 소릴 들었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 그곳은 각 집에 네 다섯 명의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다. 산으로 들로 실컷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평상 위에 수제비가 저녁식사로 준비되어 나를 기다렸고 모기를 좇느라 피워 놓은 생풀을 태우는 연기를 맡으며 여름밤이 시작되곤 했다. 그렇게 자라가던 열한 살 시골아이를 철들게 한 여름 날의 이야기가 있다.

개구리가 우리의 고문에 얼마나 견딜 수 있나를 알아보려 그 날 도 친구들과 개구리들을 전봇대에 묶고 작업(?)을 하느라 컴컴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평상시 같으면 밥 때가 지나서 들어왔다고 혼내시는 엄마와 식은 수제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집은 조용했다. 마당에 널어 놓은 고추는 마구 흩어져 있었고 모기를 좇는 연기도 없었다. 나는 엄마를 불렀다. 방문이 열리더니 언니가 벌개진 눈을 하고선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안에서 언니는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고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된 막내는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또 술에 취하신 게 분명했다. 힘에 부치는 농사일, 희망이 없어 보이는 미래에 대한 절망 그리고 아들을 낳아야만 하는 집안에서 딸만 다섯을 낳은 아버지의 아내는 고된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기에 아버지는 자주 술을 마셨다. 그 때마다 나는 싸우는 소리를 피해 동네 골목 골목을 돌아 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이상했다. "엄마는?" 나는 엄마를 찾았다. 언니는 울기 시작했다. 술 취한 아버지는 할머니와 작은 아버지와 싸우고 나가셨는데 창고에 있던 농약병이 없어진 걸 할머니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다.

엄마는 이장아저씨 댁으로 도움을 청하러 가셨고 할머니는 큰 길 건너에 사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고 했다. 배고픔도 피곤함도 밀린 숙제에 대한 걱정도 사라졌다. 손전등을 찾았다. 엄마가 꼭 집에 있으라고 했다며 붙잡는 언니를 뒤로 하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들판으로 향하는 내리막길로 뛰어 내려갔다. 개구리 울음소리와 벌레들 소리가 나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들판으로 들어가는 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들판은 평소보다 넓고도 넓었다. 손전등만을 의지해서 발걸음을 디뎠다. 좁고 울퉁불퉁한 길은 걷기도 뛰기도 힘들었다. 내가 가지 말아야 할 곳은 계단식 논에 있는 물 웅덩이 뿐 이었다.

아버지를 불렀다. 크게 작게 우는 걸 반복하는 벌레들 소리보다 커야 한다는 생각에 힘껏 불렀다. 논 사이를 다니다가 문득 할아버지 산소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2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묘 앞에 가끔 앉아 있곤 하셨다. 산으로 들어서는 곳의 풀들은 키가 컸고 산딸기 덩쿨을 지날 때 마다 팔과 다리가 따끔거리며 아팠다. 무서워서 아버지를 부를 수가 없었다. 내 심장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낮에 돗자리를 펴 놓고 놀던 산이지만 밤에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손전등을 비춰 둥근 할아버지의 묘를 찾았다. 주변을 비추었지만 거기에도 아버지는 없었다. 무서움에 쫓겨 길가로 나오자 안도감과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큰 길을 쭉 따라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점점 희미해지는 손전등을 비추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아버지가 집에 와 있게 해주세요. 그러면 아버지가 좋아하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동생들도 잘 볼께요' 눈물 때문에 손전등의 빛이 일그러졌다. 큰 길에서 집까지는 불 빛이 없어도 갈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더 이상 공부 잘 하는 친구의 책가방을 들어주는 아이가 아니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여의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적은 월급으로 동생들의 등록금을 내주기도 했지만 동생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마다 농부의 전답은 팔려 나갔다. 일하며 늦게 시작한 공부를 그만 두고 싶을 때나 세상살이가 고달프고 용기를 잃어 갈 때, 가끔 눈을 감고 열한 살 어린 내가 되어 시골 동네의 골목 골목을 돌곤 했다. 몇 번을 그렇게 했을까? 나는 어느새 어릴 적 아버지 나이의 어른이 되어 있었다.

 여름 방학이 되면 두 아이를 데리고 고향의 여름을 보러 간다. 아버지는 홍콩에서 온 손자에게 '스파이더 할아버지'로 불리 운다. 매일 아침 거미줄에서 자고 있는 큰 거미들을 잡아 마당에서 손자와 함께 놀아 주신다. 올 여름에도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그 곳에 갈 것이다. 네모 반듯하게 논들은 정리되었고 동네 구석 구석이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푸른 들판 있고 딸들을 위해 최선을 다 하신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말이다. "자식 키우기 힘들지?" 라고 말씀하시며 내 손에 용돈을 꼭 쥐어 주시는 아버지의 거친 손을 만지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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