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소도 옛 주인이 낫다더니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10-10-21 12:32:12
  • 수정 2010-11-04 10:26:20
기사수정
  • 제338호, 10월22일
 한국국제학교에 5학년까지 다닌 진호를 금년 초부터 미국국제학교로 옮겼다. 홍콩에서 태어나 홍콩에서만 자라다 보니 한국어가 영 어설퍼 한국학교 한국어 과정에 넣었드랬다. 한국어 실력이 서울애들 만은 못해도 그나마 교포아이들과 비교하면 훨씬 나을 만큼 기틀이 다져진 5학년쯤, 아이의 영어가 슬슬 문제가 됐다. ESF에 다니는 제 누이가 진호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매일 매일 놀려대기 일쑤였다. 더 늦기 전에 영어를 바로잡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4학년 때부터 ESF 초등학교에 원서를 내고 기다렸으나 자리가 없다하여 몇 년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니 중학교에 입학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를 AIS(미국국제학교)로 옮기고 며칠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선 15명 이하의 소인수 그룹에 담임이 2명인 한국국제학교에서 아이들 하나하나의 개성에 따라 교육을 하고, 아이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붓는 일명, '황태자 교육'을 받아온 진호인데, 더구나 숙제나 학교 공부보다 창의력이나 개성, 독서 등이 무엇보다 중요시 돼야한다는 나의 교육관을 전해들은 선생님들이 더더욱이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 두었던 듯 하다.

 한국학교의 개성과 무한한 창의력이나 사고력을 중시하는 교육 덕분에 진호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장난감이나 엄청난 독서량, 엉뚱한 생각이나 말, 아이디어 등에 늘 깜짝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AIS 같은 한 교실에 애들이 그득그득 들어있는데다 규율이 엄한 담임이 딱 한사람인 체제하에서 그 아이들과 색깔을 같이 하자니 죽을 맛이 아닐 수 없다.

아이 다이어리에는 아이가 산만하다, 집중을 안 하고 엉뚱한 짓을 하거나 상상 속에 빠진다, 숙제를 안한다, 애들과 너무 심하게 장난을 친다, 온갖 이상한 물건을 학교로 가져온다... 는 등의 지적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다이어리를 읽으며 가슴이 점점 답답해져 오다 화가 나기 시작했고 아이를 매일매일 꾸짖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가슴이 이렇게 갑갑하고 힘든데 한국학교에서 선생님들로부터 온갖 사랑을 받으며 기고만장하게 지내온 아이의 가슴이야 오죽할까 싶어 가슴이 아파왔다.

문제가 그리 쉽게 해결될 거 같지 않은 생각이 들어 어느 하루 날을 잡고 아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가장먼저 진호가 힘겨워 하는 부분은 '영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학교에서 영어와 한국어라는 이머전 교육을 받아왔지만 하루 종일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고 노는 국제학교의 영어수준을 따라가긴 힘든 게 사실이었다. 한 번도 다니지 않았던 영어 학원을 여름방학 내내다니기 시작했고, 수업태도는 어째야 한다, 아이들과 어째야 한다, 수업시간에 질문을 열심히 하고, 발표도 열심히 해라, 라는 조언 대신에 딴짓 하지 말고 선생님 말씀을 무조건 집중해서 들어라,는 잔소리로 바뀌었다. 매일매일 이런 일이 되풀이 되자 진호가 어느 날 한숨을 푹 내쉬며 이렇게 말을 했다.

"소도 옛 주인이 낫다더니, 한국학교가 그렇게 좋은 학교인줄 몰랐어요."

학교에서 배운 속담인지, 전래동화 속에서 나온 한 글귄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내 뱉은 이 말 한 마디가 현 상황을 기가 막힐 만큼 잘 표현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한참을 웃다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그래, 진호야 한국학교는 정말 좋은 학교야, 그러나 너는 한국인이고, 한국어 교육이나 한국에 관한 많은 것들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여 지금까지 한국학교에 다녔지만, 이젠 너의 부족한 영어와 다른 것들을 채울 차례다. 그러니 어렵고 힘들더라도 힘내서 여기서 잘해보자. 그러면 한국학교에서 그랬듯 이곳의 선생님들도 너를 인정하고 사랑하게 될거야."

"알았어요, 그래도 나는 한국학교가 좋아요. 여기서 영어 다 배우고 나면 다시 한국학교로 돌아갈래요."

"그래, 그러자. 네 옛 주인한테 돌아가자. 그 날이 언젠간 오겠지. 그러나 여기서 홀로서기를 다 끝낸 연후에 돌아가자꾸나...."

아이에게 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요즘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 진호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의 부산물인 아이 방의 온갖 잡동사니(주로 자가 제조 비행기, 자동차, 로봇, 정체불명의 무기, 우주선...)들과 온갖 학습만화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중이다. 장난감들이야 하루아침에 쓸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지만 책들은 그럴 수 없어 망설이다 다시 꽂아 놓고, 망설이다 다시 꽂아놓기를 반복한다. 이 책들이 조만간 다 없어지리란 걸 아는지 어느 날부터 아이들이 침대 밑에, 이불장 속에, 책상서랍 깊숙이 책들을 숨겨놓고 몰래몰래 읽는다. 나는 나쁜 엄마일까, 좋은 엄마일까, 이 아이를 위해 나는 어떤교육을 해야하는 걸까...

* 사족 : 이 글은 한국학교의 영어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함은 아니다. 내 아이의 개성을 존중해 주고, 창의력과 사고력을 키워준 한국학교에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무한한 감사를 드릴 것이다. 다만, 절제되고 틀에 꽉 짜인 다른 학교로 옮긴 후 엄한 선생님들 아래서 힘겨워 하며 하루하루 이겨내야 하는 내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홍콩 살이 하는 아이와 엄마의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로사 rosa@weeklyhk.com>

ⓒ 위클리 홍콩(http://www.weeklyh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0
스탬포드2
홍콩 미술 여행
홍콩영화 향유기
굽네홍콩_GoobneKK
신세계
NRG_TAEKWONDO KOREA
유니월드gif
aci월드와이드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