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지지도는 하락… 중국 선거 개입 불만 여론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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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치러진 2012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서 렁춘잉 후보(가운데)가 헨리탕 전 정무사장에 압승을 거둔 후 지지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출처 : 명보(明報)> |
지난 25일 치러진 차기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서 렁춘잉(梁振英·58세)이 선거인단 1,200명의 유효표 1,132표 중 과반을 넘는 689표를 얻어 4대 행정장관에 당선됐다.
헨리 탕 전 정무사장은 285표, 민주파인 앨버트 호 후보는 76표를 얻는 데 그쳤다.
당초 강력한 당선 후보로 점쳐지던 헨리 탕 후보가 불법건축과 혼외정사, 사생아 의혹 등 각종 스캔들에 휘말리며 홍콩 시민들의 지지율이 폭락하자 중국정부는 또 다른 친중국계 후보인 렁춘잉을 새로운 행정장관 후보로 낙점하고 선거인단을 상대로 표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선거인단의 중심축을 이루는 재계와 불편한 관계인 런충잉이 유효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홍콩 재계는 공공주택 확대, 빈곤층 지원 등 반재벌 친서민 정책을 표방하고 나선 서민 출신 렁춘잉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기업가 출신인 헨리 탕에게 강력한 지지 의사를 표시해왔다.
그러나 청콩실업의 리카싱(李嘉誠) 회장은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의 런춘잉 지지 요청도 거부하고 런춘잉이 당선되면 홍콩에서 계획하고 있는 자신의 투자를 철회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며 헨리 탕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굽히지 않았지만 막판에 그의 태도가 바뀌면서 렁춘잉은 예상보다 쉽게 유효표를 획득했다.
렁춘잉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威海) 출신으로 가난한 서민 가정의 아들에서 홍콩의 최고 위치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한 성격의 경찰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공장에 다녔다.
렁춘잉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가정이 부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부만이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 여기고 학업에 매진해 초·중·고등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에 실패한 후 홍콩공업학원(현재 이공대학)에 진학해 측량을 공부한 뒤 영국 브리스톨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홍콩에 돌아온 뒤 측량사로 일하면서 열심히 일에 매진한 결과 30대 초반에 회사 200년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파트너로 승진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렁춘잉은 선전에서 교사로 사회봉사활동을 하며 중국 내 인맥을 쌓기 시작했다.
1985년 홍콩기본법 자문위원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고 입법회 의원 거쳐 홍콩정부 자문기구인 행정회의 소집인으로 활동하다 행정장관에 출마했다.
초반 열세를 극복하고 역전 드라마를 펼치며 행정장관에 당선됐지만 낮은 득표, 낮은 지지도, 낮은 응집력 등 소위 '삼저(三低)'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의 힘을 등에 업고 행정장관에 올랐다는 언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민주파와 시민들은 친중국파인 렁춘잉의 당선으로 홍콩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고 홍콩의 민주정치가 사망했다고 한탄하며 직접 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렁춘잉이 선거 다음날 바로 중국 연락판공실(중련판.中聯瓣)을 방문한 데 대해서도 홍콩 언론은 자신에게 표를 몰아준 중국 정부에 감사표시를 하기 위해 달려간 것이라며 이는 '일국양제'를 훼손한 행동이라는 비난하고 있다.
런춘잉이 "홍콩의 시민은 권리는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시민 의견을 적극 반영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가 지하 공산당원이라는 주장 등 선거 기간 중 제기된 각종 의혹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정치에 대한 불신은 오히려 더욱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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