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행가 南北行街
동아시아 중국인 상업중심「남북행가」는 정식 거리명이 아니고 화포가(花布街-永安街), 작자가(雀仔街-康樂街), 압단가(鴨蛋街-永勝街) 등 상업행단의 별칭으로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남북행가는 남북화물의 집산지이며 「남북행」의 소재지이다.
화소왕지(火燒旺地) 남북행1841년 초 영국군이 홍콩에 상륙하면서 그해 6월 홍콩을 자유항으로 선포하였고, 상선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이렇게 홍콩은 중계무역의 기초를 다졌다.
상환 일대의 중국인 상점에서는 19세기 이래 줄곧 중국내 남북 각성(省)과 동남아 각지의 약재, 해산물 등의 잡화와 토산물을 매매하였다. 이러한 중계무역의 상품 공급원이 남과 북에 모두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남북행」이라고 하였다.
「남북행가」의 원래 명칭은 「문함서가(文咸西街, Bonham Strand West)」이며, 한인회가 입주해 있는 건물 코스코타워 뒤쪽부터 시작되는 「문함동가(文咸東街)」는 1857년 해양매립 지역에 건설되었다.
홍콩 개항 후 10년(1851년 12월 28일)에 상환 Queen's Road 일대에 불이나면서 400여 채가 넘는 집들이 불에 타 무너졌다. 당시 제3대 홍콩 총독 본햄(Sir Samuel George BONHAM)은 무너진 집들의 깨진 기와와 부서진 벽돌을 바닷가 모래사장에 매립하여 새로운 해양매립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문함가」의 영국식 명칭은 Street(거리)가 아니고 Strand(해변)이다. 오늘날 문함동가와 가까운 Queen's Road의 경사진 모습을 통해 당시 해변 모래사장의 지세를 엿볼 수 있다. 1868년 홍콩 정부는 재차 해양매립을 통해 문함서가를 건설하였다.
문함동가 서쪽 끝에서 덕보도서 (德輔道西-Des Voeux Road West)까지의 「화소왕지(火燒旺地)」는 선박들이 화물을 하역하는 삼각부두(三角碼頭)와 가까워 중국의 조주, 복건, 상, 산동 등지의 상인들을 불러들였고, 홍콩의 땅을 사서 상점을 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중 조주 상인이 가장 많았고 이때 새로운 경영방식을 도입하여 중계무역지로써 지금의 홍콩이 있게 되었다.
「남북행사무소」는 1868년 설립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이 일대를 「남북행가」라고 불렀다. 당시 간낙도서(干諾道西)에는 쌀 도매상이 많았고, 덕보도서(德輔道西)에는 건어물 가게가 많았다. 상환의 중국인 상업지구의 구성은 이때 형성되었다.
오래된 사진 속의 거리를 살펴보면, 당시 「남북행가」와 가까웠던 Possession Street(水坑口街)에는 연경림(宴瓊林), 행화루(杏花樓), 관해루(觀海樓) 등 음식점이 즐비하여 거상들이 모여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이 일대는 명실상부 요식업의 중심지이다.
홍콩에서 유명한 「남북행가」는 일찍이 상전벽해(滄桑)의 과정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중국에 무역금지를 실시하면서 홍콩의 중계무역은 큰 타격을 받았다. 남북행은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이 아니었고, 사람 수도 크게 감소하였다. 남북행사무소 역시 철거되고 재건하였다. 오늘날의 남북행사무소는 1997년 재건한 것이다.
오늘날 「남북행가」와 영락가(永樂街)를 합하여 「삼용연와가(參茸燕窩街)」라고 한다. 100년 후에 또 다시 이름이 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남북행의 경영방식
1845부터 1874까지 30년간은 남북행가의 발전 초기단계였다. 당시 유명한 상점으로는 원발행(元發行), 건태륭(乾泰隆(陳煥榮), 합흥행(合興行(柯振捷) 등 30여 곳이 있었다.
남북행의 업무는 화물매매와 화물직매를 중개하는 것이었다. 화물매매를 중개하는 규정에 「구팔추용(九八抽佣)」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오래전 「구팔행(九八行)」의 속칭으로 100원마다 2원을 수수료로 받는 것이었다. 남북행은 수수료를 받아 이익을 챙기는 것 외에 경영방식에 있어서도 돈을 벌어 들였다.
원발행(元發行)을 예로 들면 태국 쌀이 들어오는 곳이었으며, 베트남, 버마, 싱가포르 등지의 토산물을 국내로 들여왔고, 태고양행(太古洋行-Swire)의 화물운송과 자바설탕(瓜哇洋糖)운송을 대행하면서 「은행, 어음」등의 업무를 보았다.
당시 남북 중계무역을 경영하려면 모두 자신의 화물창고와 넉넉한 자금 그리고 자신의 배가 있어야 했다. 이는 규모가 비교적 큰 상점으로 심지어는 먼 길을 오가는 고객을 위해 여관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남북행의 대형 상점은 약 150명이 넘는 종업원을 두었으며, 작은 곳이라도 5-60명의 종업원이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 하였다. 이렇게 규모가 비교적 큰 남북행은 일종의 동향회관(同鄕會館)과 같은 기능을 하면서 먼 길을 오고가는 고향사람과 친구들에게 음식과 숙박을 제공하였다.
고백우(高伯雨)의《원발행의 성쇠로 바라 본 남북행》이라는 회고록을 예로 들면 "원발행 그 곳이 흥성하였을 때 식객과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고 하였고, 그의 친구는 "원발에서 한 번 머물면 10년이 넘게 머물게 되는데, 온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때의 경영방식과 넘쳐나는 인정이 전형적인 중국전통경영방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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