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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역사 산책] 센트럴 경찰서 건축물 -2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9-07-09 12:02:46
  • 수정 2009-07-09 1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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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ㅔ277호, 7월10일
빅토리아감옥-홍콩의 첫 번째 감옥
홍콩에서 최초로 견고한 자재로 지어진 영국식 건축물은 무엇일까? 정답은 1841년에 지어진 빅토리아 감옥(Victoria Prison)일 것이다. 빅토리아감옥은 Old Bailey Street맞은편에 건설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오래된 건물들은 이미 철거되었고, 일부 담벼락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당시 중국 남쪽해안에 고립되어있던 홍콩은 해적과 도적떼들이 청나라 조정 관리의 추격을 피해 불법적으로 달아나던 피난소였다. 홍콩이 영국에 의해 점령당한 후 청나라 관리들이 법을 집행할 수 없었기에 영국인들은 더욱 강력한 보안과 형벌시설이 필요하였고, 이로써 홍콩의 첫 번째 감옥이 생겨났다. 언어역시 기타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같이 영어를 쓰게 하였다. 홍콩 최초로 영국식 선창과 군영 등이 많이 지어지면서 홍콩의 모습은 뚜렷이 달라졌다.

현재의 감옥건물 자리는 1841년 홍콩이 영국에게 점령당한 후, 초임판사 William Caine이 임시로 세운 사무실초막이 있던 곳이다. 오늘 날 행정건물을 제외한 6개의 감옥은 1857년 이후로 여러 차례 증축공사를 하여 낳은 결과이다. 1898년 증축공사를 한 후, 지금의 감옥 4동을 「T」자형 건축구조로 정형화 시켰고, 1900년에 와서 빅토리아감옥이라고 정식으로 명명하였다.

1941-1945년에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면서 4동과 6동은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게다가 빅토리아감옥은 영국군과 유럽기율부대 등을 수감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1946년 홍콩이 광복하면서 빅토리아감옥은 빅토리아환압소, 사무실, 수감실 그리고 물건저장고로 썼다. 1966년 또다시 이름을 빅토리아수용소(Victoria Receptacle Centre 域多利收押所)로 바꾸었고, 그 중 4동에 청소년범죄자와 정신병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른 특수죄인을 수감하였다.

1977년 빅토리아감옥은 옛 칭호를 되찾고, 1981년대 초 많은 불법입국자와 베트남난민을 수용하기 시작 하였다. 민사사건이 증가함에 따라 감옥은 1981년 말, 1동을 입국사무소와 연락소로 삼고 일반적인 불법입국자와 베트남난민의 이전문제와 송환문제를 함께 처리하였다. 1982년 독신이거나 규율상문제가 있는 베트남만민 만을 받아들이면서 죄인의 수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그밖에 가족 불법입국자들도 있었다. 1985년 수감실을 다시 수리하여 보안시설을 강화한 후 감옥에 여성 불법입국자를 수용하였고, 후에 불법 입국한 여성죄인 수용소로 바꾸었다. 본래의 용도로 돌아온 후 수용실과 수용소에는 10,407명의 사람들이 수감되어있었다. 2000년 말, 빅토리아감옥은 석방 후 송환되거나 국경을 넘어 호송된 남, 녀 범죄자만을 수용하였다. 빅토리아감옥은 2006년 운행을 중단하였다.

 빅토리아감옥의 건축형식은 영국표준 건축구조를 따라, 영국과 동일한 점토질량과 표준용적으로 건축 되었다. 붉은 벽돌로는 영국식 방법을 따라 한 행은 벽돌 끝이 벽면을 향하게 쌓고, 한 행은 가로로 벽돌쌓기를 번갈아가며 배치하였다. 감옥은 건축함에 있어 매우 신중하여, 사전에 미리 면밀하게 계획하였기 때문에 담을 쌓을 때 벽돌과 기와를 나누어 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빅토리아감옥의 수용실은 영국방식에 따라 건축되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에는 감옥제도의 이론으로「단독식」이 유행하였다. 수감은 일종의 제지성이라는 형벌을 가지고 있어 단독수감은 죄인으로 하여금 자아반성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더욱 많은 독립수용실이 생겨났다. 그러나 홍콩의 감옥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오늘에 와서는 20세기의 「공존」이라는 수감이론이「단독식」이론과 대치하고 있다.

빅토리아감옥에 현존하는 최초의 수용소는 1860년대에 지어진 4동(D Hall)이며, 오늘날 까지 여러 번 증축공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곳 지하와 1층 수용실 바닥은 화강암이 깔려있으며, 수용실안의 돔형창문과 문 위에 나있는 통풍구멍 그리고 등잔대로 보아 오래전 수용실의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층(바닥이 상수(上數)를 향해있는 3층 펜트하우스)의 바닥은 매우 높으며, 지하와 1층에는 있는 등잔대가 없는 것으로 보아 꼭대기 층은 후에 증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의 목판문은 매우 견고한 것으로 영국이 수개월동안 먼 길을 운송해 온 것이다. 펜트하우스에는 감옥의 병원과 저장고, 육아방과 약방이 있었다.

4동(D Hall) 지하 수용실의 동쪽은 오래도록 수리를 하지 않아서 몹시 낡은데다가 빛이 들어오지 않아 하늘을 볼 수 없다. 그밖에 Arburthnot Road와 가까이 있는 수용실은 이전에 「사형실」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사형수들이 사형집행 날을 기다리며 머물던 곳이다. 「사형실」의 복도 끝에는 돌침대가 있는 시체안치실이 하나 있는데, 네 변에 홈이 있는 돌침대는 직원이 시체를 처리하기 전 먼저 피를 뽑는데 사용되었다.

6동(F Hall)은 1913년 건축 되었다. 본래는 1층 건물이었는데 수감자에게 인쇄훈련을 시키면서 참여하는 죄수가 많아지자 1931년 2층으로 증축하여 위층은 방직공장으로 아래층은 인쇄공장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제강점시기 이곳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Noronha & Co는 1956년 6동을 다시 수용실, 사무실, 수감실, 물건저장고 등으로 재건하여 이사하였다. 전쟁 후 재건된 6동에의 모든 수감실 내에는 독립된 화장실과 세면대를 두었다. 오늘날 6동 위층의 절반은 낮에 일하는 곳이었고, 나머지 절반에는 죄인을 가두는 철장 6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철장은 최소 2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철장 안에는 판자나 칸막이가 없어 죄인들은 분명하고도 조심스럽게 활동하였다.

빅토리아감옥은 빅토리아여왕의 직위시절(1837-1901)에 건축되었으며, 「域多利」라는 번역명은 중국과 영국의 문화가 접촉하던 초기에 일어나던 에피소드를 가장 잘 반영한다. 당시 한 사람의 이름은 가지각색으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Victoria」는 「維多利亞」혹은「域多利」("ia"끝소리 생략)로 번역되었다. 게다가 「Queen」은 본래 「여황」으로 해석되었어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황후 皇后」(Empress)로 잘못 번역되었다. 그래서「域多利皇后街」「Queen Victoria Street」와「皇后大道」(Queen's Road)의 번역명은 사실 정확한 것이 아니다. 오역의 원인은 아마도 중문번역자가 영국에서는 오직 남성만이 통치자였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女皇」을「皇后」로 잘못 번역한 것은 Peel Street 근처의 「列拿士地台」(Rednaxela Terrace)의 심각함 만 못하다. 과거 중문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문장을 짓던 습관이 「Alexander」라는 영문을 반대로 쓰고만 것이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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