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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역사 산책] 프랑스 선교회 빌딩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9-04-16 15:45:28
  • 수정 2009-04-16 15: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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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5호, 4월17일
프랑스 선교사의 열정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 M.E.P)는 18세기에 이미 베트남 등 동남아지역에 선교를 시작하였고, 인구가 많은 중국은 19세기중엽 이후 선교활동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중국남쪽국경에 위치한 영국의 식민지 홍콩은 중국 선교활동의 총사령부가 되어 19세기 말, 천주교수도회에서는 부동산을 매입해 양로원, 인쇄소, 행정부 등을 건축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변화로 인해 중국에서의 선교 희망은 기약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는 국면을 맞았다.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는 홍콩이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되기 이전의 독특한 지위를 홍콩의 역사에 적잖게 반영되고 있다.

프랑스 선교회 빌딩은 현재 홍콩행정구의 최종심사법원으로 바뀌었지만 이 건축물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총독 관저(官邸)
1842년 당시의 관리총독 겸 중국주재 부상무감독인 존스톤(A.R.Johnston)은 항구와 인접해있고, 정부산(政府山)을 등지고 있는 언덕위에 높은 2층짜리 저택을 지어 관저 및 사무실로 삼고는 이름을 존스톤 빌딩(莊士敦樓)이라고 하였다.

1843년에서 1846년 사이, 총독 포팅어(Sir Henry POTTINGER)와 다비스(Sir John Francis DAVIS)는 이곳에 거주했다(개항초기 총독부[오늘날의 예빈부(禮賓府)]가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

1870년대, 빌딩은 3층으로 증축공사를 하였고, 지하실과 두 개의 누각을 더 지어 외형이 지금과 비슷하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빌딩은 후에도 계속하여 미국상사인 경기양행 (瓊記洋行 Messrs Aug Heard Corporation)과 태고양행(太古洋行)지배인의 저택이었으며, 러시아영사가 거주하였다.

1879년 유태인 거상 벨리리오스(Belilios)가 이 빌딩을 사들이면서, 은행의 고위급간부들의 숙소 겸 식당이 되었다. 벨리리오스는 자신의 영국수상 디즈레일리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 이 빌딩의 이름을 Beaconsfield라고 바꾸었다.

Beaconsfield Arcade는 1880년대 중엽 빅토리아양식으로 지어진 홍콩 상류사회를 위한 고층상점이었다. 1960년 4월 Beaconsfield Arcade를 철거, 재건하여 Beaconsfield House(拱北行)을 건축하였고, 정부신문처(政府新聞處)가 이곳에 자리하게 됐다.


종교 사업부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는 1659년 파리에서 창립된 역사상 최초의 해외선교에 목적을 둔 천주교 단체이다. 이 단체는 로마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교황청과 협력하여 포르투갈의 선교독점을 방지하고 먼 동방의 나라에 교회를 건립하는 사명을 다하였다.

홍콩이 개항한지 얼마 되지 않은 1847년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옮겨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847년부터 1850년 까지 이 단체는 종교상의 업무를 주관하였다.

1875년, 선교회는 연로하고 병든 선교사들을 위해 홍콩섬 폭풀람(薄扶林)에 요양원을 짓고 그 이름을 「Bethany(伯大尼)·사진」라고 하였다. 1874년 선교회는 폭풀람산 언덕에 1860년대에 세워진 보루(堡壘)형 건축을 매입하여 확장공사를 통해 인쇄공장을 지었고, 그 이름을 나사렛원(拿撒勒院)이라고 하였다. (이 건축물은 1953년 홍콩대학에 팔려 56년에 정식으로 남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면서 이름을「大學堂」으로 바꾸었다.)

1915년 선교회는 38만홍콩달러를 들여 Beaconsfield House를 매입, 재건하여 이 종교단체의 행정사업부로 삼고「프랑스선교회빌딩」이라고 명명했다.

재건한 이 빌딩은 현재 홍콩에서 얼마 되지 않는 신고전주의양식에 속하는 건물로, 빌딩은 화강암과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3층 높이로 지어졌고, 지하실과 누각이 있다. 북쪽엔 돔형식의 작은 예배당이 있고, 2층과 3층 옥외 회랑은 이미 폐쇄되었다. 비록 빌딩은 여러 차례 내부공사를 했지만, 품질이 좋고 정교한 나무계단과 돔형의 지붕과 뜰 등 이전의 웅장한 모습은 그대로 보전되어있다.

오늘날, 빌딩의 외벽에 보존되어있는 비석에는 재건공사 완공일이 새겨져있다. 빌딩의 뒤쪽에는 성상(聖像)이 놓여있는 벽감(壁龕 : 벽의 움푹 들어간 곳)이 있어, 이 빌딩이 종교적인 용도도 쓰였던 역사를 보여 주고 있다.

옆문 정면 바로위쪽의 작은 비석은 프랑스전도회빌딩 재건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빌딩, 그 후의 운명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이 역사적인 빌딩을 점령하여 일본헌병사령부로 삼았다. 1945년 8월 홍콩이 광복을 맞자 구금되었던 스탠리의 전 총독수석비서 김슨(Frederick Gimson)은 이 빌딩에 임시정부총본부를 설립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많은 외국종교단체들이 잇따라 중국에서 철수하자 프랑스전도회도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접고, 1953년 빌딩을 홍콩정부에 팔았다.(나사렛 인쇄공장 역시 함께 팔았다)

최초의 홍콩교육청이었던 이곳은 1965년 빅토리아피크의 지방법원으로 바뀌었다가 그 후 1980년 다시 홍콩최고법원이 되었다. 1983년 빌딩은 홍콩 정부신문처(政府新聞處)사무소를 거쳐, 1997년에 홍콩최종심사법원이 되었다. 이 빌딩은 1989년 홍콩법정고적으로 지정 되었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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