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홍콩 역사 산책] 황후상광장(皇后像廣場)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9-04-08 11:17:24
  • 수정 2009-04-08 11:19:41
기사수정
  • 제264호, 4월9일
식민지통치의 권력상징
홍콩인에게 있어 '황후상광장(皇后像廣場)'이라는 이름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홍콩인들은 이 광장을 중환지하철역 입법회 빌딩 옆의 작은 공원, 매휴일 이외에도 노동자들이 모이는 곳, 시위집회가 열리며, 매년 성탄절마다 화려한 전등이 설치되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황후상광장과 홍콩역사발전의 미묘한 관계를 알고 있을 뿐이다.

황후상광장과 중심지역 해양매립계획
황후상광장은 이름 그대로 영국 빅토리아여왕(Queen Victoria 1819-1901)과 식민지통치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87년 빅토리아여왕이 제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위해 홍콩정부는 특별히 여왕의 동상을 세워 군주의 권력을 찬양하였다.

이 때 아르메니아계상인 차타드(遮打重議)는 30년이나 된 중심지역의 해양매립계획을 보류해 두었다. (이 계획은 1855년 제 4대 총독 보링(John BOWRING) 임기시기에 제기되었으나, 많은 연해상호들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고, 상환과 서환지역의 해양매립공사만이 진행되었다.) 중심지역 해양매립공사는 1889년에 시작하여 1903년에 완성되었다. 해안을 시작으로 덕보도(德輔道)에서 코넛도(干諾道)까지 중환은 57에이커(230,679m²)에 달하는 용지를 넓혔다.

동시에 차타드나이트작(입법부의원)과 케스윅(J.J. Keswick, 치지회사(置地公司)의 설립자)의 정성스럽고 치밀한 계획하에 정부와 홍콩은행은 은행 옆, 해양매립으로 얻은 땅을 접수해 황가광장(皇家廣場 Royal Square)을 조성하였다.

광장 주위의 구성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동상은 우후죽순으로 세워져 광장의 모든 구석에 즐비하였다. 빅토리아여왕의 동상을 시작으로 점점 늘어나 광장의 동상은 모두 9개가 되었다. 동상은 정부의 자금공급, 혹은 유명한 서양 상인들의 기부로 세워졌다. 그 중 가장 열성적인 한 사람이었던 차타드는 광장 주변에 빌딩을 세우고 그 건물명을 태자행(太子行)과 황후행(皇后行)이라고 지었으며, 그 후에도 주변에 끊임없이 빌딩을 세우고 역시 광장에 세워진 왕족의 동상이름을 따 건물명을 지었다. 이것은 서양 상인과 정부의 관계를 말해주는 증거이다. 광장의 정면에는 정부전용 선착장이 있었는데, 초기에 이곳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황후정박소」(Queen's Statue Wharf)라 불렸다. 1925년 재건하면서 입구를 원기둥과 아치형으로 화려하게 만들어 제1대 황후부두라 하였다. 황수상광장의 건설은 대영제국이 이 식민지의 주인이라는 것을 거듭 표명하는 것이었다.

광장의 동상은 누구?
 빅토리아여왕동상은 석조로 된 공정자(拱頂亭)안에 엄숙한 모습으로 단정하게 앉아 바다를 향하고 있었으며, 워들리가(Wardley Street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와 차타드도(Chater Road)가 교차하는 광장의 정중앙에 위치하였다. 1896년 5월 28일 홍콩정부는 성대한 제막식를 거행하면서 여왕의 77세 생일을 축하하였다.

광장의 두 번째 동상은 빅토리아여왕의 아들 코넛공작 (Duke of Connaught)이었으며, 1902년 7월5일 황후상광장에서 제막식이 열렸다. 1907년 코넛공작의 두 번째 홍콩방문을 기념하기위해 정부는 1890년 해양매립공사를 한곳에 그 동상을 블레이크부두(Blake Pier)가 마주보이는 코넛도(干諾道)로 옮겼다.

이 황가광장에는 그 밖에도 각각 4개의 여왕과 아들 손자 그리고 그들의 부인, 영국 왕 에드워드7세(King Edward Ⅶ)와 알렉산드라왕후(Queen Alexandra), 황태자와 공주(Prince and Princess Wales)를 포함해 훗날의 영국 왕 조지 5세(King George Ⅴ)와 마리왕후(Queen Mary)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 삼대가 함께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동상은 차타드가 1902년 홍콩을 대표해 런던에서 제위식에 참가한 후 기증한 것이며, 조지왕의 동상은 유이화(由怡和)무역회사의 지배인 벨 어빙(Bell Irving)이 기증하였다. 이 두 동상은 1907년 2월 6일 당시 홍콩을 방문한 코넛공작의 주관하에 제막식을 거행하였고, 알렉산드라왕후와 마리왕후의 동상은 각각 정부와 거상 마티(麽地)가 기증하여, 1909년 11월 25일 영국 왕 에드워드7세의 생일에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홍콩총독 루가드(Frederick LUGARD)는 행사에서 「다른 식민지를 보아도 광장의 동상에 필적할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여, 황후상광장의 위엄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왕족이 아닌 동상은 모두 3개였으며, 첫 번째로 세워진 동상은 홍콩은행의 총지배인 잭슨(Sir Thomas Jackson 1847-1915)이었고, 두 번째는 제15대 홍콩총독 메이핸리(Sir Francis Henry May)였으며(그의 동상은 1887년 병도화원에 세워진 총독 케네디(Sir Arthur Edward Kennedy)의 동상 외에 홍콩에서 유일하게 사직한 총독으로 동상이 세워졌다). 1923년 5월 3일 제막식에서 메이의 절친한 친구 차타드는 연설로써 그의 공헌을 표창하였다. 같은 해, 정부는 홍콩회의소 앞, 광장의 북동쪽에 평화기념비를 세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추모하였다. 홍콩은행역시 후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광장에 상을 세웠다. 광장에 동상이 즐비하여 명실상부 그 이름을 영문으로 「Statue Square」(동상광장 銅像廣場)라고 바꾸었다.

동상의 유실과 반환
 일제강점시기 물자의 부족으로 일본은 영국왕실의 권력을 상징하는 동상을 운반해 이것을 녹여 원료로 썼다. 일본군은 또한 「홍콩점령효시비」로써 빅토리아여왕 동상을 차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홍콩정부는 일본에 주둔한 동맹군총사령부를 통해 일부 동상을 찾아왔고, 그 중 에드워드 7세 부부의 동상은 영국으로 가져갔으며, 빅토리아여왕의 동상은 1957년 준공한 빅토리아공원으로 옮겼다. 광장은 1966년 홍콩은행 100주년기념 시기에 다시 녹화단지로 설계되어 연못과 정자 등의 시설을 설비하고, 잭슨동상을 돌려받아 본래 장소에 세우고는 광장에 겨우 남은 동상의 성과로써, 계속하여 홍콩발전의 증거가 되었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 위클리 홍콩(http://www.weeklyh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0
이태원_250109
홍콩 미술 여행
본가_2024
홍콩영화 향유기
굽네홍콩_GoobneKK
NRG_TAEKWONDO KOREA
유니월드gif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