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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문화산책 - 국민당 도망자들의 마을....조경령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5-08-11 11: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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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0호, 8월12일] 홍콩을 이야기하자 「교수봉-首吊嶺봉」보내진 국민당의 도망자들... 조경령(調景嶺)   오랜 옛날,..
[제90호, 8월12일]
홍콩을 이야기하자

「교수봉-首吊嶺봉」보내진 국민당의 도망자들... 조경령(調景嶺)


  오랜 옛날, 오두막 같이 초라한 사이완호의 부두에서 작은 배를 타고 동북쪽으로 약 30분 정도를 가면 가파른 사면에 붙어있는 것처럼 집들이 서 있고, 처마 끝에는 청천백일기(靑千白日旗-대만기)가 무수히 펄럭이는 작은 부락이 있었다.
  이 곳은 구룡 반도의 동쪽, 조경령(調景嶺-티우겡렝)이라고 하는 마을로, 주위는 산과 바다에 둘러싸여 시가지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이 곳은 일찍이 중국 대륙으로부터 도망쳐 온 국민당 병사들의 「도망자 마을」이었다.

  1920년대부터 계속되고 있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은, 일본의 패전 후 다시 격렬해졌으나 국민당군은 각지에서 패망했다.  1949년 10월, 공산당이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하고, 국민당의 중화민국정부는 대륙을 떠나 대만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바다를 건널 수 없었던 국민당 군인의 일부는 국경을 넘어 베트남이나 태국, 미얀마, 라오스 그리고 영국 지배하에 있던 홍콩으로 도망쳐 왔다.

  홍콩 정청은 우선 그들을 홍콩섬 서부의 난민수용소에 넣었으나 이곳은 시가지와 인접하고 있어서 공산당 지지자들과의 마찰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홍콩정청은 당시 사람이 살지 않았던 조경령에 새로운 난민수용소를 건립, 국민당 관계자 등 2만명을 옮겼다.

  이곳에는 차츰 상하이요리나 북경교자 등 중국 각지의 음식을 파는 가게도 생겨났다.  홍콩인은 기본적으로 광동어를 하고 있었지만 조경령의 도망자들은 여러 지방의 출신자로 구성돼 있어서 북경어를 공통어로 취했다.

  마을에는 큰 카톨릭 교회도 있었다.  당시 조경령에서는 대만 정부가 식량 배급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후에 미국의 크리스트교계 자선단체가 원조 물자를 나눠주면서 선교를 펼친 듯 하다.

   더 오랜 옛날, 조경령(調景嶺-티우겡렝)은 해적들의 소굴이었으며, 해적들에게 납치당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던 것에 연유하여 '목매기령' (吊頸嶺)으로 불렸다.  그러나 대륙에서 쫓겨온 국민당 도망자들이 교수령(首吊嶺-목매기령)은 너무 가혹한 이름이라고 항의하자 홍콩정부는 이곳의 이름을 중국어 발음이 비슷한 조경령(調景嶺-티우겡렝)으로 바꾸었다.

  난민수용소는 60년 이후「보통 마을」이 되었다.  당초 조경령에 수용된 2만명 가운데, 국민당 군이나 정부 관계자의 상당수는 52년에 대만으로 건너갔고, 90년대에는 국민당과 관계 없는 6000명 가량의 주민이 남아 있었다.  처음 이곳에서 식량 배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을 받기위해 잠입한 사람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10월10일「쌍십절」은 중화민국의 건국기념일로, 조경령의 축제일이었다.  마을 광장에는 축하 아치가 장식되었다.  그런 조경령에 공산당 지지자가 가끔 들어와 테러와 방화를 일으켜 왔는데, 52년 장개석 생일에는 방화로 인해 마을 대부분이 소실됐다.

이곳에는 학교도 들어섰는데 그 중 조경령 중학교는 대만 정부의 커리큘럼에 따른 수업을 실시해 만다린으로 교육하고 있었다.  학교에는 기숙사도 있었는데, 다른 중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갈 곳이 없는 홍콩 학생들도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홍콩 스타 주윤발도 이 중학교 출신이라고.

  홍콩에서는 옛부터 말을 듣지 않는 악동에게 "너 같은 나쁜 애는 조경령의 중학교에 넣을거야!"라고 위협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1997년 홍콩반환을 앞두고 '국민당 도망자마을'은 주시당하고 있었다.  홍콩 정청은 1988년 조경령을 뉴타운으로 개발하고 도망자마을도 해체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정치적으로 귀찮은 장소를 반환 전에 말끔하게 처리해 두려고 한 것이다.

  1996년 12월에 이 마을은 완전히 봉쇄됐다.  조경령을 무대로 유덕화가 출연했던 천장지구(千長地久) 영화 속에서도, 조경령에서 구룡에 나가는 것을 마치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굳은 결의를 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조경령의 거주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만 정부는「홍콩반환에 즈음해서는 국민당에 충성을 다한 사람들에 한해서 대만에서 받아들인다」고 발표했으나 실행에는 옮겨지지 않았다. 민주화가 진행된 대만에서「국민당에 충성을 다했다」를 이유로 특별 대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조경령의 주민들도 표면적으로는 「대만 정부가 돌봐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속내로는 대만에 가는 것을 바라고 않고 있었다.  연로한 도망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정든 홍콩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조경령에서 살던 사람들은 장군오 뉴타운의「후덕촌(厚    邨)」이라고 하는 정부아파트에 다 같이 모여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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