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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의 좌충우돌 시골생활기- 27편(인생에서의 중요한 결단)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7-09-27 19: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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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1호, 9월28일]   저는 예전에 부산의 명문이라는 부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저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해주는 주위 사람들이 없어서 그랬..
[제191호, 9월28일]

  저는 예전에 부산의 명문이라는 부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저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해주는 주위 사람들이 없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가정형편 때문에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졸업을 하고 군대를 갔다 와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저 그렇게 남들처럼 살아왔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혜택이라고는 그저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 뿐.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은 하루하루 고달프기만 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근검절약.  거기다 직장에 얽매인 삶을 오랫동안 살다보니 나 자신도 모르게 수동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변했지만 다행히 가난의 굴레는 어느 정도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아들은 특별히 과외를 하지 않았어도 공부를 잘 해 주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살아오는 것을 곁에서 보고 부모와의 많은 토론을 통해 한국에서 어떻게 하면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올라가는지 방식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고, 다행히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을 하였을 때 우리 부부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큰 선물이었습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을 보내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였지만 학비가 저렴하고 이곳저곳에서 장학금을 많이 받다보니 우리 부부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 되었고, 큰 무리 없이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군 입대 문제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다가 입대 날짜 때문에 졸업식에는 참석도 하지 못하고 논산에 입대를 하여 훈련을 받았는데 다행히 카투사로 선발되어 군복무를 마치고 1년 전 제대를 했습니다.  미군들과 생활하면서 익힌 영어실력 덕분인지 어땠는지 제대하자마자 취업이 되어 홍콩에서 1년간 있다가 지금은 국내 금융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자식이지만 정말 고마울 따름이지요.

  오랫동안의 직장생활은 사람의 습관까지도 바꾸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동적으로 출근을 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시간이 되면 퇴근을 하는 다람쥐 채 바퀴 같은 생활은 변함이 없었지만 가끔씩 들려지는 친구들의 창업소식이나 대박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설레기도 하였습니다.

  가끔씩 찾아오는 직장생활에 대한 지독한 염증과 상실감에 가득 찬 한숨소리.  나이를 한 살씩 먹을수록 증세는 심해졌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대책을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가진 것은 아파트 한 채와 약간의 은행저축.  저것을 몽땅 털어 창업을 해 봐?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에 빠져있던 어느 날.   제 인생에 중대한 결정을 내렸고 그렇게 하여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때가 제 나이 38세 때였고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한 동안 시골 생활에 빠져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가고 나니 학비에 대한 부담이 사라졌습니다.  거기다 나이는 정년을 향해 끊임없이 달리고 있었고, 하루하루 변함없는 생활의 지루함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생활이 편하기는 하지만 이대로 직장생활을 계속하다가 정년퇴직하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바야흐로 제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었고 어떤 결정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하루아침에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이사를 하자는 결단을 내렸을 때 그 결단은 우리 가족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제 아들의 교육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저희 가족 나름대로 많은 결단을 내려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제 미래에 대해 이보다 더 큰 결단을 해야 한다는 데 부부가 동의를 했고 오랫동안의 장고 끝에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잘 다니고 있던 회사에 사표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아무런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는 결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흘러갈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월급쟁이에 대해 영원히 안녕을 고하는 도박을 한 것입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회사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표를 내고 난 뒤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여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2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가 소원한 것이 바로 여행이었기 때문이었지요. 도대체 여행이 무엇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여행을 간다는 말인가?

  저는 회사에 근무할 때 업무 때문에 여러 차례 외국을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아내에게 해외여행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업무로 가는 여행과 이런 여행은 다르지 않습니까?

  처음 선택한 나라는 일본.  여행사에 가서 호텔팩으로 계약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계약서를 보여주었지만 아내는 글쎄? 갈수 있을까요? 반신반의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25년간 수없이 여행약속을 부도냈으니 말이지요.  일본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태국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여행하였고 내친김에 친구부부와 같이 유럽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개월간 해외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은 단하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아내와 의논했던 <창업>을 했습니다.  프리랜서의 일을 시작한 것인데 업종은 제가 지금까지 해 왔던 <기계설계>  투자비는 거금 40만원.  사무실은 집의 작은 방.  사용하던 컴퓨터의 구형 모니터를 LCD 20인치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각종 구인광고 사이트를 검색하여 저의 경력과 안내장을 수없이 많은 업체에 메일로 보냈지만 걱정은 태산 같았습니다.  나에게 누가 일을 맡길 것인가?  내가 지금까지 주력했던 업종과 전혀 다른 업종의 설계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일이 없으면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메일을 보내고 인내하면서 기다리기를 2개월 정도 했을까요?  마침내 처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렇게 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리랜서의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최초로 전화가 온 회사를 찾아갔었지만 미숙한 탓에 업무 계약은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고정급을 받고 일을 해주는 회사가 2개있고 나머지 시간은 여러 업체에서 주문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 말에는 고정급을 받고 일을 해 주던 회사와 계약이 해지되었었지만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고 다시 구인 업체에 메일을 보냈는데 처음 수 백군데 메일을 보냈을 때 비해 응답률이 엄청나게 상승했습니다.

  처음에 수없이 많이 메일을 보냈을 때 응답률은 2%정도였지만 이번에는 20군데 메일을 보내고 2군데 연락이 왔으니 10%로 급상승했습니다.  그 중 한 업체와 계약을 하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글 : 구행복 9happy0508@hanmail.net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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