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왕초보의 좌충우돌 시골생활기- 19편(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7-07-26 15:25:15
기사수정
  • [제183호, 7월27일]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그렇게 열이 났다가 열이 내리면 그 다음에는 땀이 엄청나게 났습니다. &nb..
[제183호, 7월27일]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그렇게 열이 났다가 열이 내리면 그 다음에는 땀이 엄청나게 났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을 얼렸다가 삶아서 쥐어짜는 그런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었는데 당시는 지금처럼 병원 시스템이 발달되지 않아서 제가 아팠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장티푸스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의 병 때문에 굿도 한 기억이 납니다.  무당이 시퍼런 칼날을 제 입에 물리고 펄쩍펄쩍 뛰면서 "물러가라! 물러가라!" 하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지만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였지요.

  당시 얼마나 많은 약을 먹었는지 한번 먹을 때 한 주먹만큼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도 그때 연습한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영양제를 먹을 때면 물과 함께 먹지 않고 알약만 냉큼 삼켜 버리는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드러누운 지 3개월이 지나자 이제는 식구들도 기진맥진하여 얼른 숨 떨어지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뒷집, 옆집 할 것 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단 한 사람.  어머니는 결코 장남을 이렇게 버릴 수 없다 하여 마지막 수단으로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한의원으로 저를 데려가서 진맥이나 한번 받아 봐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저를 리어카에 싣고 한의원으로 갔습니다.

  한의원에 도착하여 웬 송장을 리어카에 싣고 들어가려 하니 주인이 기겁을 하지 않겠습니까?  당시 그 한의원 주인이 중국인이고 부인이 한국 여성이었습니다.  부인이 고함을 지르며 난리를 치니까 중국 한의사가 뛰어 나오더니 우리 부모님더러 빨리 나가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울며불며 매달리면서 죽어도 좋으니 약 한 첩이라고 지어달라고 하였답니다.

  중국인 한의사가 어머니의 애절한 요구에 마지못해 대답하는 것을 그의 부인이 통역하여 말하는데 "그러면 약 2첩을 무료로 지어 줄 테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집에 가서 이 약을 달여 먹여 보고 만일 아드님이 대변을 보거든 그때 다시 오시랍니다"

  부모님은 중국인 한의사가 공짜로 지어준 약 2첩과 제가 실린 리어카를 몰고 부랴부랴 집으로 와서 약을 달여 시체처럼 누워서 목 윗부분만 살아있는 저에게 숟가락으로 한약을 먹였답니다.  바야흐로 약 2첩에 제 목숨이 달렸습니다.

  한약을 먹은 후 30분쯤 지났을까요?  죽어가던 제가 뭐라 뭐라 끙끙거리더랍니다.  삼신할머니와 그의 할머니 그리고 그 할머니의 할머니에게 제발 저를 낫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던 어머니가 그 작은 변화를 놓칠 리가 있겠습니까?

  즉시 저를 일으켜 요강에다가 앉혔는데 당시 겨우 숨만 붙어 있었지 죽어가던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만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힘을 줄 수 없어서 부모님들이 저더러 힘을 내라고 응원 차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서 동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제가 죽은 줄 알고 우르르 몰려왔다가 저의 배변을 구경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나마 숨을 쉴만한 에너지조차 없었던 제가 엄청난 고통 끝에 조그만 숯덩이 하나를 내 보냈답니다.

  3개월을 거의 먹지 못하고 고열과 땀으로 시달렸으니 아마도 내장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타서 재가 되었나 봅니다.

  그렇게 하여 죽음 직전에서 정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그 후 3개월을 죽과 시금치 된장국, 그리고 그 중국인 한의사가 지어주는 한약을 먹고 조금씩 기운을 차렸는데 당시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이 다 빠졌었고, 걸음마를 다시 배웠습니다.

  드디어 아프기 시작했을 때로부터 6개월 후 처음으로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와! 숟가락 무겁다!"  식구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저는 숟가락이 그렇게 무거운 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염소고기와 만호씨
  제 아들도 초등학교 1학년 때 장티푸스를 앓았지만 7일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니 거뜬히 낫더라구요.  그런데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간호사가 장티푸스 주사를 놓을 때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아들은 간호사가 주사기를 가져오는 모습을 보게 되면 벌써 공포에 쌓여 주사 놓기도 전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옆 침대에 누워있던 어른이 한마디 하는데 "나는 얼마 전 장티푸스 주사 맞고 어른이지만 얼마나 아픈 지 엉엉 울었다, 어린아이 치고는 진짜 잘 참고 있네"  장티푸스 주사는 몸에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링겔의 호스를 이용하여 주사하는데 그 주사액이 들어가는 동안 저와 아내는 아들의 팔을 마사지 하느라고 땀을 흘릴 정도였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주사였습니다.

  저는 그처럼 장티푸스로 엄청나게 아팠던 이후로 잔병은 없었지만 결혼하고 나서 겨울에 머리를 제대로 감지 못할 정도로 체질은 약했습니다.  그러다가 직장 동료의 소개로 섬에서 키운 염소 한 마리를 5만원 주고 사서 염소고기 요리를 해 먹고 대단히 큰 효과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였는지는 몰라도 염소 뼈를 여동생에게 주고 말았는데 아내는 지금도 그때 염소 뼈 고아 만든 육수를 먹지 않은 것을 대단히 통탄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염소 고기 두루치기는 거의 제가 다 먹었는데 섬에서 기른 염소라 그런지 하루 세끼를 먹어도 질리지가 않을 정도로 맛이 있었고 그 염소고기를 먹고 난 후 제가 건강 체질로 바뀌었는데 그렇게 변화된 저를 보고 아내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때 아내가 염소 뼈를 고아 먹지 않고 여동생에게 양보한 것을 못내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각이 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염소를 한 마리 보양식으로 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염소를 키우고 있는 사람이 있는 지 수소문해 보던 중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이만호라는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이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농장에서 염소를 키우고 있으니 자기가 말해서 싸게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염소 잡는 것은 자신이 있으니 저더러 조금 도와주기만 하면 우리 집 마당의 우물가에서 자신이 직접 염소를 잡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만호 씨는 농사를 짓다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약간 절룩거리면서 나이가 40이 넘도록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당시까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성격이 급한 탓에 첫 말을 약간 더듬었습니다.

  아내가 전하는 만호 씨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휴일을 이용하여 거사를 벌이기로 하였습니다.

  드디어 휴일이 되어 아침 일찍 만호 씨와 저는 차를 타고 근처에서 염소를 키우고 있는 농장으로 갔는데 집에서 15분 정도 거리의 근처 야산에 도착하니 염소를 키우고 있는 농장이 나타났고, 약간 뚱뚱하고 걸걸한 말투의 아주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주머니와 흥정 끝에 한 마리에 15만원을 주기로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목에 줄을 매고 있는 염소 한 마리를 데리고 오며 하는 말이 "저 차에 실고 갈라꼬?"  "예..."  "그라몬 트렁크에 실어야겠네..."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은 힘을 합쳐 염소를 들어 승용차 트렁크에 실었습니다.

<글 : 구행복 9happy0508@hanmail.net / 계속......>
0
홍콩 미술 여행
본가_2024
홍콩영화 향유기
굽네홍콩_GoobneKK
신세계
NRG_TAEKWONDO KOREA
유니월드gif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