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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문화산책 [홍콩을 이야기 하자] - 홍콩의 해적 '장보자(張保仔)'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7-05-23 11: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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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5호, 5월25일]   지난 주 청차우섬(長州島)에 있는 장보자동(張保仔洞)을 소개하면서 잠시 언급한 홍콩의 해적 '장보자(張保仔)..
[제175호, 5월25일]

  지난 주 청차우섬(長州島)에 있는 장보자동(張保仔洞)을 소개하면서 잠시 언급한 홍콩의 해적 '장보자(張保仔)'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장보자는 1800년 전후 홍콩섬과 란타오섬을 본거지로 삼고 홍콩 해역 일대에서 활약했던 해적이다.  장보자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중국 해적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중국 역사에 유명한 해적은 많지만, 사료에 나타나는 최초의 해적은 후한(後漢)의 장백로(張伯路)이다.

 장백로는 황하 하구 부근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장백로는 인근에 있는 해적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내륙의 비적과 결탁해 한때는 천자(天子)를 넘볼 정도로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7세기 무렵이 되면 이슬람 국가의 성립과 함께 광주가 중국·동남아시아·아랍 세계를 묶는 이른바 남해 무역의 거점이 되면서 해적들의 활동 범위도 남하했다.

 게다가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네덜란드가 대만을 거점으로서 중국 무역을 개시했고, 그 무역선을 노린 해적들도 대만을 무대로 삼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지룡(鄭芝龍)이었다.

  장보자(張保仔)는 생년 미상이지만 19세기 초두의 대표적인 해적의 한 사람이다.  어부의 아들이었지만 당시 활약하던 대해적 정일(鄭一)에게 납치되면서 해적이 되었다.  총명한 미소년이었던 장보자는 정일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후 장보자는 정일이 죽고 그의 처 석씨의 신임을 받아 정일의 조직을 계승, 광동성 연안에서 활동하는 전설적인 해적이 됐다.  이 때 붉은 기를 내세우고 활약하던 이들 해적집단을 사람들은 홍기방(紅旗幇)으로 불렀다.

  한편, 청나라 정부는 장보자를 정벌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했다.  몇 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구룡성채(九龍城塞)가 건설되기 전 이곳은 포대(砲台)였으며, 이를 건설한 이유가 장보자의 퇴치를 위한 것이었다.

  이후 장보자의 퇴치를 위한 정부의 노력은 지속됐다.  청조정부는 1810년에 들어서 양광총독에 백령(百齡)이라는 관리를 임명했는데, 그는 온화정책을 써서 장보자를 회유해 항복을 받아냈으며, 지략과 무술에 뛰어난 장보자는 무관으로 지내며 천수를 누리다 황비홍(黃飛鴻)이 태어나던 해인 1822년에 생을 마감했다.

  한편 장보자는 해적으로 활동하던 시기, 상인들로부터 노획한 보물을 청차우섬 한 켠에 있는 작은 돌섬에 숨겨뒀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장보자동(張保仔洞)'이라 불렀다.  

  이후 장보자동은 홍콩인들로부터 사랑받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홍콩에는 장보
자동 이외에도 장보자에 관련된 사적이 다수 남아있다.

 우리가 잘 아는 빅토리아 피크의 홍콩명은 '차기산(扯旗山)'으로 장보자가 자신의 깃발을 내걸면서 '차기산'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하며, 현존하고 있는 빅토리아 피크에 이르는 장보자 옛길(張保仔古道)은 그중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상환 인근지역의 '서영반(西營盤)'은 장보자의 서쪽 기지를 의미(영반(營盤)은 군사기지)하고, 홍콩 남쪽의 '라마섬(南Y島)'에도 '장보자도(張保仔道)'라고 불리는 길이 있다.

  또한 장보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도 있다.  94년대 개봉된 이 영화의 제목은 그의 이름 그대로 '장보자(張保仔)' 이다.

 장보자는 이 영화에서 사실과는 다른 민족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다.  장보자에 대한 홍콩인의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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