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쟈키 하야오(Miyazaki Hayao, 1941-) 감독의 일본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Mononoke Hime, 1997>에는 대자연의 섭리를 상징하는 초월적인 존재인 사슴신(시시가미, シシ神)이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사슴신은 치유와 소생은 물론 죽음까지 관장하는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일본 샤머니즘에서 사슴은 생명을 치료해주는 영적인 힘을 가진 샤먼으로 만물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모노노케 히메>가 개봉한 것은 2003년으로 20년 전의 오래전의 일이지만 영화 속 사슴의 그로테스크 하면서도 신성한 모습이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홍콩 크리스티 옥션 프리뷰에서 코헤이 나와의 <픽셀(Pixcell>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사슴 조각(Pixcell-Deer)을 만났을 때 영화 속 사슴신이 떠올랐다[그림1]. 나와의 여러 사슴 조각들은 유명 미술관이나 전 세계의 다양한 장소에 자리하고 있다. 홍콩에서 만난 사슴 조각 역시 서 있는 장소나 배경과 상관없이 반짝이는 반투명한 구슬로 이루어진 아름답지만 독특한 느낌을 전해주는 신비로운 존재로 서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는 왜 많은 동물 중에서 사슴 조각을 가장 많이 만든 것일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슴은 일본 신화와 전통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다. 일본의 불교사원들은 사슴의 서식지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나와는 교토에서 대학을 다닐 때 일본 지방의 종교 조각이나 건축물들을 보면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신과 성물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사냥꾼이자 농부였던 할아버지에게 신화와 민화를 듣고 일본적 감성에 기저에 있는 애니미즘에 대하여 이해했다고 한다. 애니미즘은 자연에 영혼과 생명력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이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는 자연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성스럽게 존재하는 ‘사슴’이라는 소재를 탐구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 사슴신을 등장시킨 미야자키 감독 역시 종교 사원을 여행하다가 사슴을 보고 각본을 완성했다. <모노노케 히메>는 당시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대립시키던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인간을 자연과 동물을 파괴하는 절대 악, 그리고 동물을 절대 선으로 그리지 않고 각자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린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사슴신은 극에서 자연 그 자체로서 인간과 동물의 한 편에 서지 않고 생명을 주지만 빼앗기도 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주요하게 존재한다.
대립하지만 늘 함께인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다루는 사슴의 모순은 나와의 조각에서도 발견된다. 나와의 <픽셀>은 디지털 이미지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픽셀(pixel)’과 세포를 의미하는 ‘셀(cell)’의 합성어이다. 사슴 조각을 이루고 있는 구슬 하나하나를 ‘픽셀’로 이해했을 때 사슴 조각은 하나의 인공적인 조형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셀’로 이해하면 사슴이라는 생명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실제로 조각 속에는 사슴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각에서 사슴은 박제되어 구슬 내부에 존재하는데 이는 동물의 가죽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슴은 세포를 가진 생명이었지만 박제됨으로써 픽셀의 개념으로 변화한다. 나와의 조각 앞에서 조각 속 박제된 사슴을 실제로 인식하는 순간 관람자는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그림2].
사슴 조각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구슬들은 내부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렌즈 역할을 하면서 보는 이의 감각을 키우게 만든다. 이를 통해 관찰된 박제된 사슴과 이를 감싸고 있는 구슬들은 나와의 사슴을 인공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힘들게 만들고, 그렇다고 이를 자연의 사슴으로 받아들이기도 힘들게 만든다. 사슴 조각은 균형 잡힌 자세로 살짝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생명체로 다가왔다가 기괴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사신으로 변형되었다.
나와가 만든 픽셀이라는 합성어처럼 사슴 조각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쉽게 파악할 수 없고 정의하기 힘든 모호한 회색 지대를 만든다. 나와의 사슴 조각이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간극은 우리가 세계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바라보는 것들이 확실하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PLACE: Christie’s Hong Kong
소더비와 함께 세계 최대의 경매회사로 본사는 영국 런던에 위치한다. 1986년 홍콩에 진출하였다. 5월과 11월에 홍콩 컨벤션 전시 센터(Hong Kong Convention and Exhibition Centre)에서 프리뷰 전시와 함께 주요 경매가 열린다. 지난 크리스티 옥션에서 코헤이 나와의 사슴 픽셀 조각은 약 13.5억 원에 판매되었다.
칼럼 소개 : 홍콩에서는 가장 큰 아트 페어 중 하나인 아트 바젤이 열리고, 세계적인 옥션 회사들이 일 년 내내 프리뷰와 전시를 개최하며, 대형 갤러리들은 동시대 작가들의 최근 작품을 쉴 틈 없이 선보인다. 그리고 홍콩에는 M+ 미술관과 홍콩고궁문화박물관 등이 위치한 시주룽문화지구, 시대에 상관없이 내실 있는 전시를 선보이는 HKMoA와 시각예술 복합문화공간인 K11Musea, PMQ, 타이콴 헤리티지, 전 세계의 유명 및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중소형 갤러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홍콩은 동서양의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이 살아 숨 쉬는 미술 도시이다. [미술도시, 홍콩] 칼럼은 미술교육자 원정연이 이러한 장소들을 방문하며 전하는 미술, 시각문화, 작가, 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정연
미술사/미술교육을 공부하고 미술을 통한 글쓰기를 강의했습니다. 현재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온·오프라인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홍콩의 다채로운 시각문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 석사 졸업, 서울대 사범대학 미술교육(이론) 박사 수료
- 강남대 교양교수부 강사, 서울대 사범대학 협동과정 책임연구원 및 창의예술교육과정 강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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