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특히, 자연에서 우리가 보는 색채는 본원적이고 지속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날씨나 빛, 대기 등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러한 성질을 발견하고 화폭에 담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르네상스 이후 미술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미술운동인 ‘인상주의’의 문을 연 화가이다. 그의 상징적인 수련 연작이나 건초 더미 연작에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이 다양한 색채로 포착되어 있다. 이러한 회화는 당시 권위 있는 아카데미에서 인정하는 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네는 전통적인 회화적 표현보다는 직접 경험하고 자각한 풍경을 그렸다. 모네는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유래된 1874년 작,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에서 빛과 대기의 효과를 그려내기 위해 일렁이는 듯한 붓 터치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는 3차원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그리다 만 그림처럼 보였다. 실제로 이 그림은 당시 “만들다 만 벽지보다 못하다”라는 비평을 받았다.
모네는 신랄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빛을 주제로 몇 시간이고 풍경 앞에 앉아 그 형태와 빛, 대기가 한 화면에 녹아드는 아름다운 인상주의 작품들을 완성했다. 1883년부터는 파리의 작은 마을인 지베르니에 일본식 다리가 놓인 정원을 만들어 작업을 시작했고, 1893년 집 앞의 개울을 이용하여 거대한 연못을 만들어 수련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정원 옆 유리로 된 작업실에서 반사되는 빛에 의해 변화하는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에서 전시하고 있는 모네의 <붓꽃(Irises)> 역시, 모네가 자신의 지베르니 정원에 심은 붓꽃을 다리 위에서 관찰하고 그린 그림이다[그림1]. 2m의 큰 그림에는 정원의 황톳빛 작은 길을 무성하게 자란 붓꽃이 둘러싸고 있다. 모네는 대담하고 투박한 획으로 보라색, 파란색, 흰색을 사용한 붓꽃과 두꺼운 풀색 줄기를 그렸다. 그는 작업에 몰입하여 아침, 낮, 저녁 내내 그림을 그렸다. 그는 결국 백내장으로 시력이 약해져서 형체와 색채를 제대로 구분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림의 대담하고 투박하게 칠해진 형태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색채가 본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또 다른 화가의 작품이 모네의 작품 옆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현대미술 작가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잔디와 나비(Long Grass with Butterflies)>이다[그림2]. 고흐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감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색채를 사용했다. 그림의 주제나 형태, 색채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던 인상주의 이후 등장한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고흐를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칭한다. 후기 인상주의는 엄밀히 말해 인상주의 회화와 닮은 점이 별로 없고, 각자의 개성적인 표현 방법을 확립했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내디뎠던 혁신적인 변화의 연장 선상에 이들이 있었다는 포괄적인 의미로 이들을 후기 인상주의라 부른다. 이중, 강렬한 붓 터치와 화려한 원색으로 개인적인 감성을 표현한 고흐는 프랑스 남부의 정신병원에 머무는 동안 <잔디와 나비>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잔디는 초록색과 풀색일 뿐만 아니라 노란색, 갈색, 파란색, 연보라색, 보라색, 회색으로 산재해 있다. 정신병원에서 내려다본 작은 초원을 보며 고흐가 그은 색채는 획의 하나하나와 함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물감 덩어리들은 전체적으로 마구 찍고 그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바라보면 고흐가 다양한 길이의 풀잎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연구하여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획들은 붓 놀림으로 형성된 물감 덩어리들과 함께 점, 선을 이루며 잔디가 퍼져있는 공간을 만든다. 고흐는 임의적인 원색을 사용하여 풀잎 하나하나에 자신의 감정을 주입하여 왜곡되고 과장된 풀의 공간을 만들었다.
모네는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려 자신이 경험한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끝에 시력을 잃어 그 상태로 지각한 풍경까지 남겼다. 고흐는 눈에 보이는 풍경을 통해 발현된 감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우울하고 고독했지만 격렬했던 감정 끝에 잡초가 뒤섞인 초원 자체가 남았다. 이 다르지만 비슷한 붓 터치로 완성된 이들 작품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보면 팔레트에서 섞은 색들보다 더욱 강렬한 느낌을 전해준다.
PLACE 홍콩고궁박물관
홍콩고궁박물관은 2022년 총 7층 규모로 개관하여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관에서 대여한 914점의 소장품들을 통해 중국의 왕실문화를 관람할 수 있다. 총 9개의 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평소 5개의 전시장에서 상설전시를 통해 중국 고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나머지 전시장에서는 특별전 등을 관람할 수 있다. 현재 《런던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보티첼리부터 반 고흐까지(Botticelli to Van Gogh: Masterpieces from The National Gallery, London)》가 전시 중이다.
칼럼 소개 : 홍콩에서는 가장 큰 아트 페어 중 하나인 아트 바젤이 열리고, 세계적인 옥션 회사들이 일 년 내내 프리뷰와 전시를 개최하며, 대형 갤러리들은 동시대 작가들의 최근 작품을 쉴 틈 없이 선보인다. 그리고 홍콩에는 M+ 미술관과 홍콩고궁문화박물관 등이 위치한 시주룽문화지구, 시대에 상관없이 내실 있는 전시를 선보이는 HKMoA와 시각예술 복합문화공간인 K11Musea, PMQ, 타이콴 헤리티지, 전 세계의 유명 및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중소형 갤러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홍콩은 동서양의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이 살아 숨 쉬는 미술 도시이다. [미술도시, 홍콩] 칼럼은 미술교육자 원정연이 이러한 장소들을 방문하며 전하는 미술, 시각문화, 작가, 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정연
미술사/미술교육을 공부하고 미술을 통한 글쓰기를 강의했습니다. 현재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온·오프라인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홍콩의 다채로운 시각문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 석사 졸업, 서울대 사범대학 미술교육(이론) 박사 수료
- 강남대 교양교수부 강사, 서울대 사범대학 협동과정 책임연구원 및 창의예술교육과정 강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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