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성모자상은 시대와 종교를 초월하는 정서적인 교감을 일으킨다. 이러한 성모자상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묘한 기품을 가진 인물들을 조화롭게 구성한 라파엘(Raphael, 1483-1520)의 성모자상이 떠오른다. 라파엘의 성모자상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장점들을 융합하고 극대화하여 단순함 속에서도 부드럽지만 강한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라파엘이 그린 성모는 “모든 이의 어머니, 어머니들의 원형”으로 불린다.
지금 홍콩고궁박물관에서 라파엘의 <성모자와 세례 요한(The Virgin and Child with the Infant Saint John the Baptist>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홍콩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런던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보티첼리부터 반 고흐까지(Botticelli to Van Gogh: Masterpieces from The National Gallery, London)》에서 전시 중이다. 이 전시를 통해 15세기 르네상스 시기부터 20세기 초 후기 인상주의까지 서양 미술사의 긴 기간 동안 각 시대를 대표했던 화가들의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다[그림1].
이 전시의 첫 번째 부분에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에 제작되었던 성상들(Sacred Images)을 마주한다. 성상은 개인의 영성 생활에서 영적인 대화의 장을 제공하고 신성을 느끼게 해주는 종교적 이미지이다. 서구 전통에서는 아주 먼 옛날부터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성서와 마찬가지로 영적 체험을 느낄 수 있는 시각적 언어로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성모자상은 하느님의 어머니인 성모와 아기 예수의 숭고한 존재를 경험하게 해주는 대표적인 성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피렌체와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라파엘뿐만 아니라 베네치아와 플랑드르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했던 르네상스 화가들의 성모자상을 통해 각 화가의 지역적 특색과 독창성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라파엘의 작품과 그 바로 옆에 자리한 퀸텐 마시스(Quinten Massys, c1465-1530)의 성모자상은 플랑드르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그림2]. 미술사에서 북유럽 르네상스에 속하는 플랑드르는 벨기에 북부 지역으로 이 중에서 마시스가 활동했던 안트베르펜은 플랑드르의 중심부였다.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유화 물감을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그림의 세부묘사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마시스는 <보좌의 앉은 성모자와 네 천사(The Virgin and Child Enthroned, with Four Angels)>에서 아름답고 화려한 세부묘사로 성모자를 천상의 마리아와 위엄있는 하느님의 아들로 묘사했다. 고딕 양식의 성당에서 신자들의 기도를 그리스도에게 전해주는 교회의 어머니로서의 성모는 금색 왕좌에서 예수를 품고 앉아 있다. 성모의 머리 위 두 천사는 에나멜과 유리로 섬세하게 묘사된 왕관을 씌우려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내려오고 있고 양옆에 자리한 두 천사는 각각 류트와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아기 예수 역시 언젠가 흘릴 피를 상징하는 붉은 산호로 만든 염주를 목에 걸고 성모가 들고 있는 구약의 책갈피를 잡아당기고 있다. 성모의 소매에서 살짝 보이는 회색 모피, 청록색 드레스와 붉은 망토의 금색 자수와 진주 장식, 성모의 옷자락이 닿는 곳에 있는 기하학적 무늬의 이국적인 카펫 등의 치밀하고 꼼꼼한 묘사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신비하고 입체적인 마시스의 성모자상과 달리 라파엘은 그리스도교의 신심과 이교적 미를 통합하여 평안하고 안정적인 성모상을 구축했다. 인물들은 로마 시골을 뒤로한 아치형의 건축적 요소를 배경으로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에 자리한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성모의 이미지는 한 아이를 안고 있는 평범한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모는 머리에 두른 터번과 같은 동시대의 일상으로부터 유래한 모티브를 사용하여 현실적이고 우아한 모습을 갖췄다. 아기 예수는 성모의 무릎 위에 앉아 무언가를 다 아는듯한 표정으로 갈대 십자가를 들고 털 옷을 입은 세례 요한이 건네주는 카네이션을 잡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연의 법칙과 해부학, 원근법 연구에 몰두했다. 라파엘 역시 이러한 탐구를 통해 인물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했다. 따라서 인물들은 작은 공간에서 뒤틀린 자세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시선과 움직임은 명확하고 고요하다. 이러한 조화로움 속에서 라파엘의 성모상은 마시스의 작품에서 보였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세부묘사보다는 화면 전체의 균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 간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인식하게 한다.
이 너무도 다르지만, 천재적인 화가들의 성모자상은 성모와 아기 그리스도가 앞으로 일어날 고통을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신성한 사랑의 표현으로 고뇌보다는 묵상과 생각을 권한다. 중세까지 성모자상은 전통적이고 공식적인 테두리 안에서 그려졌다. 그러나 르네상스 화가들의 독창성으로 두 그림은 천상의 사명을 성취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내면의 섬세한 질서와 긍정을 불러일으킨다.
PLACE 홍콩 고궁박물관
홍콩 고궁박물관은 현대미술관인 M+ 미술관과 함께 빅토리아 항구 옆 시주룽문화지구에 위치한다. 2022년 총 7층 규모로 개관하여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관에서 대여한 914점의 소장품들을 통해 중국의 왕실문화를 관람할 수 있다. 총 9개의 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평소 5개의 전시장에서 상설전시를 통해 중국 고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나머지 전시장에서는 특별전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칼럼 소개 : 홍콩에서는 가장 큰 아트 페어 중 하나인 아트 바젤이 열리고, 세계적인 옥션 회사들이 일 년 내내 프리뷰와 전시를 개최하며, 대형 갤러리들은 동시대 작가들의 최근 작품을 쉴 틈 없이 선보인다. 그리고 홍콩에는 M+ 미술관과 홍콩고궁문화박물관 등이 위치한 시주룽문화지구, 시대에 상관없이 내실 있는 전시를 선보이는 HKMoA와 시각예술 복합문화공간인 K11Musea, PMQ, 타이콴 헤리티지, 전 세계의 유명 및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중소형 갤러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홍콩은 동서양의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이 살아 숨 쉬는 미술 도시이다. [미술도시, 홍콩] 칼럼은 미술교육자 원정연이 이러한 장소들을 방문하며 전하는 미술, 시각문화, 작가, 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정연
미술사/미술교육을 공부하고 미술을 통한 글쓰기를 강의했습니다. 현재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온·오프라인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홍콩의 다채로운 시각문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 석사 졸업, 서울대 사범대학 미술교육(이론) 박사 수료
- 강남대 교양교수부 강사, 서울대 사범대학 협동과정 책임연구원 및 창의예술교육과정 강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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