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바젤이 열렸던 3월부터 홍콩의 미술관, 갤러리, 옥션 프리뷰, 그리고 명품 판매장까지, 홍콩의 현대미술 현장은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 1929~)의 시그니처 모티프인 물방울무늬(Polka dots) 호박 이미지로 넘쳐 났다. 그리고 올해로 95세가 되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아시아 최대 규모로 조명한 M+ 미술관의 《YAYOI KUSAMA: 1945 to Now》 전시는 끝이 났지만, 지금도 미술관의 메인홀에서는 7월 말까지 그녀의 귀엽고도 그로테스크한 호박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그림1].
호박 모티프는 1940년대 중반 처음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형태와 색깔로 변형되어 사람들 앞에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 M+ 미술관으로 들어가면 그녀의 수많은 호박 중, 하나는 길쭉하고 다른 하나는 넓적한 모양을 한, 두 개의 노란색 호박을 감상할 수 있다. 이 호박들은 거대한 크기와 노란색과 대비되는 검은색의 물방울무늬로 처음에는 조금 기이한 인상을 주지만, 금세 호박이 가진 익숙함으로 친근한 느낌을 느끼게 해준다.
작가는 어린 시절 호박이 가진 이러한 유머러스한 형태와 소박한 따뜻함에서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가끔은 호박들이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부유했지만 불행했던 가정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쿠사마에게 이 사람 같은 호박들은 마치 삶의 기쁨에 관하여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고, 작가는 호박이 가진 긍정적인 느낌 때문에 어린아이 같은 열정으로 호박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 수 있었다. 세상에 똑같은 모양의 호박이 없듯이 열정으로 만들어낸 그녀의 호박들은 긴 시간 동안 다채롭게 변형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색깔과 모양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은 것은 바로 호박이 가진 물방울무늬였다. 그렇다면 그녀의 호박들은 왜 물방울무늬일까?
물방울무늬는 회화, 조각,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쿠사마의 전 영역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등장하는 패턴이다[그림 2/3]. 그녀의 작품들은 대개 이 물방울무늬로 뒤덮여 있으며, 이 무늬는 캔버스와 조각을 넘어 벽과 건물 전체로 확장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강박적이고 아이코닉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물방울무늬는 사실 그녀의 정신적인 문제인 환각과 관련이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 환각을 경험하고 그 반응와 대응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을 떠나 미국 등지에서 팝아트, 설치, 퍼포먼스의 영역을 넘나들며 아방가르드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70년대부터 자발적으로 일본의 정신병원에서 거주하며 창작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그림4].
그녀는 캔버스에 물방울무늬를 그리다가 캔버스를 넘어 벽 전체로 물방울무늬가 퍼지고 나아가 방 전체가 물방울들로 가득 차 자신을 집어삼키는 환각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녀의 작업은 대부분 이러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의지로 점철되었다. 쿠사마는 환각을 창조적인 모티프로 승화하기 위해 호박뿐만 아니라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물방울무늬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즉, 환각을 통해 창조한 예술적 모티프를 아이코닉하고 강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으로 승화시켜 세상과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무한한 노동의 흔적처럼 보이는 물방울무늬 회화나 거울에 반사되는 끝없는 물방울들의 공간들은 관람객을 쿠사마가 경험한 환각의 상태로 몰입시키고 있다[그림5]. 반복적인 물방울무늬의 연결이 만든 시각적이고 정신적인 무한함은 관람객들에게는 환상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작가 스스로에게는 창조를 통한 치유로 작용하며 예술의 의미를 확장했다[그림6].
[그림4] M+ 미술관에 전시되었던 쿠사마의 다양한 작품들과 퍼포먼스 기록들.
PLACE: M+ 미술관
홍콩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빅토리아 하버가 내려다보이는 시주룽문화지구에 자리하고 있다. 홍콩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전시와 교육을 제공하고, 예술과 문화가 가지는 영향력을 통해 동서양의 교두보 역할을 하겠다는 비전으로 2021년 개관했다. 33개의 갤러리, 3개의 영화관, 미디어 테크, 교육 시설, 연구 센터 등을 포함한 빌딩은 스위스 건축회사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설계했다.
칼럼 소개
홍콩에서는 가장 큰 아트 페어 중 하나인 아트 바젤이 열리고, 세계적인 옥션 회사들이 일 년 내내 프리뷰와 전시를 개최하며, 대형 갤러리들은 동시대 작가들의 최근 작품을 쉴 틈 없이 선보인다. 그리고 홍콩에는 M+ 미술관과 홍콩고궁문화박물관 등이 위치한 시주룽문화지구, 시대에 상관없이 내실 있는 전시를 선보이는 HKMoA와 시각예술 복합문화공간인 K11Musea, PMQ, 타이콴 헤리티지, 전 세계의 유명 및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중소형 갤러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홍콩은 동서양의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이 살아 숨 쉬는 미술 도시이다. [미술도시, 홍콩] 칼럼은 미술교육자 원정연이 이러한 장소들을 방문하며 전하는 미술, 시각문화, 작가, 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정연
미술사/미술교육을 공부하고 미술을 통한 글쓰기를 강의했습니다. 현재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온·오프라인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홍콩의 다채로운 시각문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 석사 졸업, 서울대 사범대학 미술교육(이론) 박사 수료
- 강남대 교양교수부 강사, 서울대 사범대학 협동과정 책임연구원 및 창의예술교육과정 강사, 서울대 기초교육원 학부생 글쓰기 상담 튜터 등 역임
ⓒ위클리홍콩의 모든 콘텐츠(기사 등)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