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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한인70년사] 제 2장. 격동기(군사 정변- 월남전 직후, 1960-1970)
  • 위클리홍콩
  • 등록 2022-12-30 13:52:11
  • 수정 2022-12-30 14:5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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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격동기 (군사 정변- 월남전 직후, 1960-1970)


1. 첫 해외 지사 진출


1950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수출주도형 성장을 추구해온 한국 정부는 무역상사의 해외 진출이 추진되어 해외지점 및 출장소의 설치가 인가되었고 경비 송금이 허가되자 우리나라에서 몇 개 상사의 지사가 홍콩에 설치되었다.


당시 설치된 지사는 이한산업(지사장 오정익)이 생돈 수출을 위하여 현지 법인을 설립하였고, 영풍상사(출장소장 이성진- 제40대 교민회장), 곧 뒤이어 (주)천양산업(지점장 손상용- 제 33대 교민회장), (주)남방물산(지사장 마영호), (주)대한농산(지사장 손한주- 제34, 35대 교민회장, 한국창업투자 사장) 모두 5개 상사 7명의 주재원을 두게 되었다. 또한, 한국에서 미성 핸드백으로 잘 알려져 있던 박순영 사장(Le Beau 핸드백 사장)이 홍콩에서 핸드백 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수출고 총액이 중석 수출분을 포함하여 미화 2,000~3,000만 불 정도로, 미화 200~300만 불 정도면 수출 1~3위를 할 정도였었다. 당시 대 홍콩 수출 품목으로 마른오징어, 생돈(生豚), 한천, 홍삼 등 농산물이 주요 취급 품목이었으며 특히 돼지는 비료 구상무역의 대금상환 조로 홍콩에 수출되었다. 품질은 문제가 없어 좋은 값을 받았지만, 부산-홍콩 간 4~7일 동안의 항해 기간 중 사료 부족과 뱃멀미로 인하여 부산에서 적재 시의 중량의 10~20%가 감량되어 채산이 별로 맞지 않는 사업이었으나 비료 대금을 갚기 위해서는 돼지 밖에 값이 나가는 수출 품목이 없었던 실정이었다. 농수산물 및 축산물 거래선은 모두 중국인이었고 자연히 농수산물 취급상들의 밀집 지대인 남북행(南北行)과 생돈 거래가 이루어지는 케네디 타운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었다.


홍콩에 진출한 첫 무역상사 지점장들. 왼쪽부터 손상용, 손한주, 이성진, 김재명, 윤재명 씨(1964년)

그 당시 이미 한국은행 홍콩 지점(초대 천병규, 2대 한상원, 3대 백명은)이 영업 중(대리급 이상 행원 5명이 근무)이었고, 동남아 정기선 Siam Line을 위하여 대한해운공사(大韓海運公社) 홍콩 지점이 개점 중이었다.


당시 대표적인 교포상사는 태한무역유안공사(泰韓貿易有眼公司 사장 이규일/5,6대 교민회장), 공평행(公平行 사장 박인식/초대 한인상공회장), 향기무역(香其貿易 사장 현근/18대 교민회장)등이 있었다.


당시 총영사관(5대 총영사 문덕주)은 Queen's road의 Manyee Bldg(萬宜大厦)에 위치하였으며 첫 상무관으로 정민길 영사(전 홍콩 청영사)가 주재하며 생돈 수출협의회도 만들고 위혜진 옹께서 현지 채용 영사 담당 부영사로 근무했다.


2. 한국학원(현 홍콩한국토요학교) 시작


한국학원은 코리아센터 5층으로 옮김으로써 본궤도에 올랐다. 사진은 초창기 한국학원의 수업광경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민 수가 늘어나고 교포 자녀의 수가 많아지자 한국어 교육과 제2세대들에게 한국 혼을 심어줘야 한다는 교육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강춘희 제3대 총영사와 교민회장(이낙산)은 상의하여 홍콩 중구 Manyee Bldg(萬宜大厦)에 있던 영사관 사무실을 빌려 매주 토요일 오후에 영사 책상을 옆으로 밀어 놓고 원탁 2개에서 여섯 명의 교포 자녀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960년 3월 1일 홍콩 한국학원이 설립되었고(교실 2, 교사 2명, 학생 6명), 이것이 한때 학생 수 720여 명에 달한 적이 있으며 2019년 12월 현재 학생 수 500명이 넘는 한국학원(현 홍콩한국토요학교)으로 발전한 것이다.


<홍콩한인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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