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초창기 정착 시대(1949-1959)
1. 한인사회 형성
1966년 진필식 총영사와 함께 8.15 기념식과 축하 파티를 연 교민들
한국 사람이 홍콩에 와서 살게 된 것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중국에서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홍콩에 오거나 혹은 상해에서 득세하는 인민해방군에 쫓겨 상해, 대만 등지에서 홍콩으로 피난 온 이후이다. 그들은 대부분 귀국하였으나 약 40여 세대가 남아서 사업 활동을 하게 되면서 교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48년 1월 중국 특사 정한범 씨의 부탁을 받고 당시 홍콩 세관 출신인 이락산 씨가 우리나라 전매청과 홍삼 대리 판매계약을 맺어 “한국공사”를 설립하고 홍삼 판매를 시작함으로써 한국인들이 진출하여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2. 홍콩 영사관 설치
1949년 7월 11일. 부임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차균찬 초대 영사 후임으로
취임키 위해 공항에 내린 김용식 영사 (왼쪽에서 3번째)
1949년 5월 1일 처음으로 주홍콩 영사관이 설치되고 초대 영사로 상해에서 근무하던 차균찬 씨가 부임하였으며 영사관 개설에 따른 제반 대 홍콩정청 접촉이 시작되어 전매청 물건을 취급하던 이락산 씨가 앞장서서 일을 도와주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중구 Queen's Road(皇后道) Edinburgh Tower(公爵行) 맞은편에 있던 빅토리아 호텔 601호실을 공관 사무실로 정하고 차균찬 영사는 602호실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차 영사는 취임 후 한 달 만에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염원하던 공관이 설치되고 국가 의식을 갖게 된 교포들의 희망이 불과 한 달 만에 침체되고 초대 공관장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국내에서는 소위 마카오 무역이라고 부르는 물물교환 무역이 시작되던 때였고 마침 마카오 무역을 하던 서남공사 사장 서산하 씨가 교역차 홍콩에 주재하고 있어 홍콩화 5,000불을 차용하여 홍콩 총독부장관, 각국 공관장들의 참여하에 장례식을 거행했다. 종전 후 대만 등지에서 대거 내향했던 사람들을 합해서 약 100여 명의 교민이 참석하였었다. 장례비는 얼마 후에 본국 정부에서 송금되었다.
1949년 8월 11일 제2대 홍콩 영사로 김용식 씨가 부임하였고 11월 27일 총영사관으로 승격되어 초대 총영사로 이정방 씨가 부임하였다. 부임할 때까지 영사 서리 정규섭 씨와 이락산 씨가 공관을 지켰다.
3. 홍콩 한국 교민회 발기
1948년 3·1절 기념행사 홍콩교민신춘모임(신년하례회) 기념서명첩
(1948년 음력 1월 3일, 교민회 설립을 발기함, 총 28명)
한편 상해에서 득세하는 인민해방군에 쫓겨 피난 온 교포들이 중심이 되어 1948년 1월 3일 대동주가(大東酒家)에서 교민 28명이 참석하여 홍콩 한국교민회 발기 대회(발기인 홍순택, 박인식, 김연철, 진태균, 이락산)를 개최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독립을 내외에 선언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49년 3월 1일 대호반점(大湖飯店)에서 홍콩 한국교민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초대 회장에 진태균 씨를 선출하였고 홍콩정청에 등록하였다.
새로 설립된 홍콩 한국교민회는 교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인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한국 교민증을 발행하고(여권 대용으로 사용) 등록 제1호 진태균 씨를 필두로 137명의 명단을 작성하고 모든 인적사항을 기록한 후 이민국에 제출하여 1949년 7월 1일 자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거주 허가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적 없이 피난 중이던 교포들의 홍콩 거주 문제가 해결된 것이었다. 그 후에 본국 정부에서 소지인의 특징이 기재된 여행권, 지금의 여권이 1954년 7월에 발급되었다.
1950년 3.1절 기념식 행사를 마치고 개최됐던 제2회 홍콩 한국교민회 총회에서 이락산 씨는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그는 제3대, 7대, 11~15대, 17대, 19~20대 등 무려 열한 번이나 교민회장직을 맡았으며 교민 상호 간에 친목을 도모하고 상부상조하며 한인사회의 복지 향상을 위하여 이바지한다는 교민회 정관에 규정된 목적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교민 수는 적었으나 배 타고 본국을 드나들며 12시간 이상 걸리는 프로펠러기를 타고 왕래하던 시기였으므로 본국의 저명인사나 정부 요원 또는 국제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이 간혹 홍콩을 들러서 갔고 우리에게 본국의 소식 한 토막을 전해주는 것이 고마운 시절이었다. 그러한 때에는 교민들은 의례 서로 연락하여 한자리에 모여 소찬박주로 그분들을 접대했고 교민회장, 총영사, 한국은행 홍콩 지점장은 외빈접대 요원 노릇을 하면서 1950년대를 넘겼다.
<홍콩한인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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