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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영 회장의 생활칼럼 시즌2] 7탄- 싱가포르(가족과의 재회)
  • 위클리홍콩
  • 등록 2022-03-29 16:03:09
  • 수정 2022-03-29 17:3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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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서 '유림사리' 법인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던 1984년 말이었다. 이리안자야 현장에서 생산되는 원목을 수출하기 위하여 원목 수입상이 많이 있었던 싱가포르지사에 발령을 받았다. 건설수주 부문과 산림개발 부문의 업무를 병행하여 관리하는 사무소의 지사장으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싱가포르 물가가 비싸다 보니 시내에서 택시로 1시간 떨어져 있는 말레이시아 국경의 베독(Bedok)이라는 신도시 지역에 전임 건설지사장이 살았던 숙소에서 싱가포르 생활을 일단 시작하였다. 도마뱀이 천장과 방바닥 그리고 벽에 수없이 기어 다녀서 엄청나게 징그러웠으나 이리안자야 정글에서 모기와 온갖 벌레들과 정(?)이 들었기에 싱가포르의 숙소는 나에게는 그래도 견딜만한 곳이었다. 전임자가 본국으로 귀국한 후 몇 달 뒤 오게 될 보고 싶은 가족을 위하여 새로운 집을 계약해야 했을 때 당시의 월세로는 시내에서는 아파트를 구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예산 한도를 조금 초과하여 괜찮은 주거지역에 숙소를 임대하게 해달라고 본사에 요청하였으나 승인이 나질 않았다. 따라서 그 당시 외국인이 거의 살지 않았던 카통(Katong) 지역의 정부 아파트에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집주인이 상당히 구두쇠여서 에어컨을 달아주지 않았고 오래된 선풍기만 덩그렇게 천장에 달려 있었다. 또한 엘리베이터가 매 층마다 설 수 없는 정부 아파트라 한 층을 올라가던지 내려가야만 했다. 

 

싱가포르 로컬식당 앞에서 5개월 된 딸을 안고 있는 아내아내한테는 백일이 갓 지난 딸아이를 하루종일 돌보며 선풍기만 의지하고 고온다습한 여름 날씨와 싸우며 살아야 했던 최악의 주거환경이었다. 그 당시에 선진국인 싱가포르에서 에어컨 없이 살았다고 하면 아직도 믿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다. 또한 침대 매트리스마저도 몇십 년 동안 사용하여 중간 부분이 웅덩이같이 푹 꺼져 있어서 등바닥이 불편하여 도저히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실내 전체의 바닥도 몇십 년 전의 타일 바닥에 카펫도 깔려있지 않아서 아기들이 떨어지면 위험한 상태였다. 팔심이 약했던 아내는 유모차로 계단을 오르내릴 수가 없어서 유모차 대신 포대기를 주로 사용해서 딸아이를 업고 장을 보러 다녔다. 가족과 재회하기 두 달 전 혼자서 집을 구하다 보니 침대의 매트리스나 엘리베이터의 불편함에 대해서 세심히 관찰을 못 했었고, 인도네시아에서의 지옥 같은 생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지낼만하다고 생각되었다. 후진국 생활에 젖어있었던 나는 이미 산속의 나무 밑에서도 잘 수 있는 야만인(?)으로 변해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처음 시작한 외국 생활은 아내에게는 문화촌 달동네 단칸방 못지않은 상당히 힘든 신혼생활의 시작이었다. 신혼 초에 임산부의 몸으로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한방에서 1년 이상 인내하며 지냈고, 남편의 큰 보상을 기대하고 백일 된 갓난아기와 외국에 첫발을 디딘 아내를 나는 엄청난 배신감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회사의 경비지출 한도에 너무 집착하여 시내에 인접한 숙소를 찾다 보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현지인도 살기를 꺼리는 슬럼가였다. 회사의 주택수당에 관한 과잉 관리로 전임자의 예산을 증액하지 않겠다는 병적(?) 집착이 가정적으로는 빵점짜리 남편을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내는 자주 위험한 계단을 오르내리며 유모차에 딸아이를 태우고 에어컨이 있었던 시내 백화점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면서 피난 생활(?)을 하였다.


잔디밭에 앉아 있는 9개월 된 딸 보람이런 여러 가지 어려운 신혼생활 속에서도 기쁜 생활도 물론 있었다. 백일이 지나 한창 이쁜 딸아이(보람)를 퇴근 후 무등을 태우고 바닷가나 시내의 백화점에서 윈도우쇼핑을 하고 다녔던 생활은 나에게는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신혼 기간이었다. 또한 싱가포르 근무를 계기로 가족과 재회하기 전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학생 때부터 가끔씩 다녔던 성당에 주일마다 참석하여 외로운 타국생활에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으며, 예배 후 친해진 성도들과 골프도 같이 치면서 교제를 하고 가족이 없는 무료한 생활에서 탈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가족과 재회하기 전 성당 교우들과 골프 중인 필자가족과의 재회 후에는 오직 회사업무만 열심히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정부가 합판의 원자재인 원목을 '가공'하여 수출하도록 하는 정책을 갑작스럽게 발표하고, 원목 수출 금지조치를 내려서 회사의 장래가 극도로 불투명하게 되었다. 그러자 지사의 재무 상황이 악화되었고, 지사의 경비지출 등이 여의치 않아서 싱가포르 사무실 계약을 만료하고 에이전트 사무실에 책상을 빌려서 임시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나는 가끔씩 토요일 오후 퇴근과 함께 자가용에 여행준비물을 싣고 가족과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인접국 말레이시아의 조호바루(Johor Bahru)를 거쳐 말라카 그리고 수도인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까지 다녀오면서 현지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파악하였다. 싱가포르가 주위의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어떠한 경제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이곳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미리 터득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 나라들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었던 중국인 화교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었다. 영어, 중국어 등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중국어를 꼭 배워야겠다는 각오를 이때 다짐하였다.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독립기념비 앞에서 가족사진나에게 있어서 싱가포르 주재 생활은 회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우둔하고 편협한 직장생활 원칙을 고수한 것을 빼놓으면, 딸아이와 아내와의 재회로 꿈같은 시절을 보냈던 나날이었다. 반대로, 아내에게 있어서 싱가포르에서의 신혼생활은 중년 이후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여겨지기까지 무려 3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홍콩에 살면서 싱가포르 출장 기회에 같이 가자고 하면,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곳"이라던 아내가 몇 년 전 갑자기 자신의 회갑 여행을 싱가포르로 가자고 제안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다 아내는 아직도 실천을 못 했지만, 우리 부부는 코로나 상황이 호전되면 어려웠던 시절에 같이 살았던 싱가포르의 거리 모습을 다시 가서 느껴보기로 했다.

 

14면 <시즌 2를 마쳤습니다. 다음호 시즌 3-1 [홍콩 정착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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