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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영 회장의 생활칼럼] 제4탄 - 중국 제조업 진출 이야기
  • 위클리홍콩
  • 등록 2021-12-29 20:36:13
  • 수정 2022-02-15 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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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주방용품제조와 인연을 맺게된 것은 고교동창인 두류실업 노시철사장의 요청에 의해서 였다노사장은 한국의 대우실업을 거쳐 창업한 후 1980년초에 유럽시장에 한국의 주방용품을 OEM(주문자상표)방식으로 공급하여 성공한 오퍼상이었다당시에 한국에서 노동집약적인 산업인 주방용품 제조가 갈수록 인건비 상승으로 말미암아 제조환경이 어렵게 되자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으로 급격하게 이동하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운영 회장(사진 오른쪽)

홍콩을 방문한 노사장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중국쪽 공장 어레인지는 중국중앙정부의 고위층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평소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홍콩친구Edmond Yao의 소개로 이루어졌다당시 대부분의 중국공장은 국가소유의 국영업체였으니 공무원과의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었다본인이 최종 선택한 중국오지의 신흥현(新興縣) 'AAA' 공장은 해외시장에 대한 정보력이 제한되어 SilverStar에 처음부터 공장의 모든 수출에 대한 권한을 위임하여 파트너가 되었다그리고 지방정부의 관리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본인은 공장과 협업하여 수출을 위해서 모든 정부지원을 받아가며 신속하게 생산설비를 현대화하고 확대해 나갔다.   

   짜오칭시 단조구 경제고문위촉식(김운영 회장(사진왼쪽))

당시 중국이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시행함으로 공장에서 모든 생산에 대한 비용책임을 떠맏고 오퍼상인 두류실업은 중국공장과의 무역거래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공장의 제품이 완성되면 결제를 하는 비지니스 형태였다따라서 두류실업이 중국공장에 대하여 오더를 쥐고 있는 막강한 갑의 입장이었다물론 본인은 그당시 첩첩산중인 광동성 짜오칭(肇慶 )신흥현(新興縣)에 위치한 'AAA공장'에 몇년동안 드나들며 제조업의 모든 과정을 관리감독하게 되었다또한 중국어를 할 수있는 사람이 한국 측에서는 아무도 없어서 대부분의 업무를 본인이 처리하고모든 품질 생산 선진기술 등은 직접 한국의 기술자와 상의한 후 중국에 전달하였다통역사겸 엔지니어 역할도 병행해야 했었다당시에는 홍콩에서 중국 짜오칭신흥현까지는 머나먼 출장길이었다

 

한번 공장에 가려면 홍콩에서 새벽에 출발하는 배를 타야했다중국 짜오칭시에 도착하여 차량을 이용하여 신흥현에 있는 임가공 공장(AAA)에 오후5시가 되어서 도착하였고,비가오는 날이면 비포장도로에 산길이라 저녁10시경에 도착하기도 하였다그 당시 신흥현과 같은 오지는 전화 교환기 시스템이 낙후한 시기여서 홍콩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한번 걸려고 새벽부터 계속 시도하면 저녁 10시정도에 통화가 되었던 호랑이 담배 피웠던 시절이었다.

   

본인은 공장이 위치한 지역이 광동성 중에서도 가장 오지인 이유로 아예 공장근처 허름한 호텔에 거주하며 24시간 제품 생산에 매달려서 공장의 관리직원들과 동고동락 하였고 중국인들과 같이 생활하며 중국인의 습성을 이해하게 되었다이러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인 최초로 지방정부의 개방정책을 도와주는 역할인 짜오칭시 단조구(端州區공산당 경제 고문에 위촉되기도 했다.

 

본인이 중국내에서 어레인지하고 관리하였던 이지역의 생산수출은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고그후로 신흥현은 중앙정부가 광동성 최대의 주방용품 수출지역으로 선정하여 육성하였다이무렵 두류의 급속한 오더증가로 한공장의 임가공 수출로는 물량을 공급할 수 없어서 생산비용이 저렴한 타 신규공장과의 임가공협력을 두류가 직접하기 시작하였다생산원가가 이미 많이 상승한 기존 AAA공장은 이제까지의 인간관계를 고려하여 본인이 계속 운영을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이때부터 두류실업과의 협력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따라서 90년대 중반기에는 두류실업이 유럽 오더를 타 공장으로 완전히 이전하게 되었고 외국시장 판매력이 전혀 없었던 AAA공장은 기존 유럽시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일시적으로 두류실업과의 협력이 중지된 즈음에 중국내에서는 주방용품 제조공장 설립붐이 막 일고 있었던 때라 본인은 이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의 선진 설비를 중국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면서 대부분의 중국주방용품공장에 한국산 Brazing Machine(브레이징머신)을 공급할 수 있었다제품수출보다 더 부가가치가 좋은 비즈니스였다당시에 중국 공장들이 꼭 필요한 설비였기에 가능했으며,그당시에는 하이텍 제품이라 중국산이 없었으며 ,유럽산이 2배의 가격이라 가능했었던 비지니스였다.

 

넓은 중국내 모든 주방용품공장지역을 방문하여 기계설비판매 시운전을 직접해주는 엔지니어 역할도 담당하였다경제학을 전공한 본인이 이런 공학도가 하는 일들을 감당하다보니 어려움도 많았지만 많은 엔지니어링 경험을 축척했던 시절이었다중국에 한국산 설비판매 비지니스를 바쁘게 하고 있던 시기에 두류실업이 떠난 AAA공장측으로부터 바이어 개발을 간곡히 요청받았고동시에 브레이징 설비를 판매하여 설치해주었던 많은 공장들도 본인에게 수출을 의뢰하기 시작하였다따라서 이때부터 가장 중요한 바이어 발굴을 위하여 주요 해외 전시회를 홍콩본사 SilverStar 직원들과 참가하는 일이 본인의 주요 비지니스 일정중의 하나가 되었다.

 

두류실업과의 협력시절에 한번도 수출한 적이 없었던 미국시장을 목표로 새롭게 출발을

모색 하였다미국 시장은 유럽시장과는 완전이 다른 모양의 제품과 제품가격을 요구하였다미국 백화점 바이어와의 인연이 없었던 터라 이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새로운 출발을 해야하는것이 공장 가동을 위하여서는 제일 중요한 과제였다.

 

다행히 미국 전시회에서 만났던 유태인인 Harold Nash(해롤드 내쉬)라는 바이어와의 우연한 인연으로 미국시장에 한번도 주방용품을 브랜드로 출시한 적이 없었던 ONEIDA(오네이다브랜드의 냄비제품을 중국의 가공공장에서 본인의 주도로 생산하게 되었다몇년동안 본인이 유럽의 주요백화점에 두류실업을 통해서 유명제품들을 OEM해주었던 사실과 중국 생산 전문가로 이름이 이미 알려져 있을때 였으니 본인을 찾아와서 미국시장 비지니스를 한번 해보자고 하였던 것이다


Trial Order1컨테이너를 3개월후에 선적시킨 후, 6개월후에 5백만불,1년후에 천만불,2년뒤에는 두배로 오더가 증가하여 매년 급격하게 수출을 하게 되었다아무도 예상치 못한 대박 오더였다드디어 광동성 신훼이(新會)라는 곳에 짱먼(江門)시 국영기업과 본인이 합자로 '골도리 공장'을 설립하였고주위 10여개의 가공공장에 실버스타가 이제는 Oneida 대리인입장으로 오더를 주는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보람공장 앞 정도경 발자노 대표

그당시 본인의 이름을 바이어들이 Oneida Kim으로 부르기도 하였다몇 년 뒤에는 신훼이 구징(古井)에딸의 이름을 따서 100% 단독투자의 '보람(BORAM)공장'으로 발전하였다이러한 모든 일들이 주방용품 오퍼상으로 잘 알려진 두류실업과의 초창기 만남 후에 일어난 인생행로의 변화였으며 풍년압력밥솥으로 유명한 세광 알미늄과의 합작으로 심천 풍년전기 공장설립 그리고 신일전기의 Malaysia MEC에 대한 Turn-Key Base 세탁기공장 설비수출 등으로 진화하였다.

 

2012년에는 동종업계 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하여 제조업 이윤창출이 없어진 중국 'BORAM 공장'을 매각하고브랜드 마케팅으로 사업방향을 전환하여 이태리 100년 역사의 BALZANO(발자노브랜드를 인수하여 거듭 태어났다

 

최근에 겪고 있는 중미간 무역전쟁과 코로나 사태를 바라보며 10여년 전에 중국제조업을 포기하고 유통으로 변신한 결정이 옳았다고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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