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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만세!!!! -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19-02-26 16:19:39
  • 수정 2019-02-26 16: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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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3월 1일(금)은 역사적인 날이다. 대한민국의 출발점이자 근대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뿌리인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주홍콩총영사관..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시위 (사진=독립기념관)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시위 (사진=독립기념관)
 

2019년 3월 1일(금)은 역사적인 날이다. 대한민국의 출발점이자 근대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뿌리인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주홍콩총영사관과 홍콩한인회 주관으로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한국국제학교에서
개최된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관하여 성찰해보기로 한다.

3월 1일, 동시다발로 일어난 만세시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참이었다. 독립 운동가들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한국 대표를 급파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막한 사흘 후인 1월 21일에는 고종이 급사했다. 국내외적 상황이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종교계와 학생들이 독립운동 준비에 나섰다. 때마침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서울은 3‧1운동을 잉태한 곳이었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의 종교 지도자들을 아울러 민족대표를 꾸렸고 경향각지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은 일사분란하게 독립시위를 준비했다.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는 이른 새벽에 학생들이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작되었다. 정오 무렵부터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들은 속속 탑골공원에 집결했다. 반면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였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갖고 경찰에 그 소식을 알렸다. 곧 헌병과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시각 수천 명이 운집한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서울 시내는 만세소리로 가득 찼다. 3월 1일에 서울에서만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평양․진남포․안주(평남), 선천․의주(평북)․ 원산(함남) 등 6개 도시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였다. 평양에서는 오후 1시에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내로 나와 연합시위를 벌였다.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진남포에서는 오후 2시에 감리교와 감리교계 학교 교사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천도교인과 노동자들도 참여했다. 안주에서 오후 5시에 일어난 만세시위는 기독교 청년지도자들이 주도했다. 선천에서는 장로교계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정오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거리로 나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천도교인들도 가담했다. 의주에서는 오후 2시 30분에 기독교인과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이 주도하고 천도교인이 연대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원산에서는 오후 2시에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이 연대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함께 했다. 이처럼 서울을 포함해 7군데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들은 연대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3월 1일 7군데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다음날부터 인근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3월 1일부터 14일까지 2주간 전국에서 일어난 276회의 만세시위 중 70%를 웃도는 197회가 북부지방에서 일어났다. 3월 중순을 넘어서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중남부 지방에서 주로 일어났다. 3월 하순에 다시 북부지방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지면서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만세시위의 절정기를 이뤘다. 매일 50~60여회에 이르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독립운동의 산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중국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자들이 수립했던 임시정부의 명칭이다.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들의 모임, 신한청년당이 3·1 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모임,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4월 13일 정식으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신인 신한청년단은 독립을 위해 강국들과의 외교적 위치를 선점하고자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단으로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국내외 동포사회에 통할 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임시정부의 설립 초기에는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을 운영하여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는 정상적인 정부 외교가 아니었으므로 여러 가지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치권이 유효하게 미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법상 정부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민족에게 현실적으로 미치고 있는 통치권은 국제법상 불법적으로 강탈한 일제의 권력이었기 때문에, 통치권의 현실적 존재는 이념상 부정되어야 했다. 그리고 외교활동은 주로 미국과 중국에 대해 이뤄졌는데, 대미외교는 초기에, 대중외교는 종전기에 보다 두드러졌다. 그리고 초기에 파리통신부가 주도한 강화회의와 유럽 각국과 소련 등의 외교가 있었다.

제국주의가 국제정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당시, 민족자결의 원칙은 독일·오스트리아·터키 등 동맹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을 뿐, 도덕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간 외교로, 그들이 한국독립을 위한 인도주의적 고려를 심각하게 반성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서재필(徐載弼)의 활약이 매우 커서, 미국인이 한국친우회를 결성할 정도였다. 위와 같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적 처리로 인해 상대적으로 만주와 연해주(沿海州)의 독립군단체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100주년을 맞이하여 애국선열들의 피와 땀, 정신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기념하며,
대한민국 100년의 발전과정을 성실하게 성찰하고, 나아가 희망찬 미래의 대한민국이
되길 희망한다. (출처 :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회)

주홍콩총영사관과 홍콩한인회 주관으로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한국국제학교에서
개최된다.
일시 : 2019년 3월 1일(금) 오전 10시
장소 : KIS(홍콩국제학교 대강당(3F)) 55 Lei King Road, Sai Wan Ho, Hong 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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