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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상하이 '최후의 결투'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05-12-01 12: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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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5호, 12월2일]   "베이징과 상하이의 결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과 경제..
[제105호, 12월2일]

  "베이징과 상하이의 결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과 경제 중심인 상하이(上海)의 신경전은 실로  대단하다.  친절하기로 유명한 상하이 사람들이지만 베이징 사람만 보면 표정이 달라진다.

보통화(표준말)로 말하다가도 베이징 사람이 오면 어느새 상하이말로 바꾼다.  두 방언은 완전히 다르기에 한마디도 못알아듣는 것은 당연하다.  골탕먹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상하이에서는 상하이 방식으로"라는 우월주의가 깔려 있다.

  상하이와 베이징의 역사는 그래서인지 싸움으로 점철된다.  단적인 예가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에 일어났다.  상하이는 마오의 3번째 부인인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의 거점이었다.  4인방은 장칭과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등을 일컫는다.

  1976년 그 4인방들은 마오가 사망한 뒤 권력을 장악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을 중심으로 한 `문혁파(文革派)'들이 전면적으로 마오쩌둥의 권력을 계승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거사는 덩샤오핑을 지지하는 군부 지도자 예젠잉(葉劍英) 원수에 발각된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인 화궈펑(華國鋒)은 예젠잉과 리셴녠(李先念), 천시롄(陳錫聯), 왕둥싱(汪東興) 등과 연합해 4인방을 체포했다.  결국 상하이파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중국공산당은 정치국회의를 열어 이들을 반당(反黨) 집단으로 결정했다.  1980년 11월부터 베이징에서 이들에 대한 공개 재판이 시작됐다.  장칭이 당당하게 큰 소리를 치는 가운데 이들에게 형이 선도됐다.  장칭과 장춘차오에게는 사형을, 야오원위안에게는 20년 징역, 왕훙원에게는 무기징역을 각각 선고했다.

  `4인방'의 체포와 재판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종결됐다.  그 후 문혁파들은 권력에서 숙청됐고, 화궈펑을 넘어 덩샤오핑(鄧小平) 일파가 실권을 장악했다.

  상하이의 베이징을 향한 도전은 이렇게 끝났다.  문혁파의 제거 이후 상하이는 개혁·개방 중에도 외면당한다.  덩샤오핑은 상하이가 아닌 남부 광동(廣東)지역을 첫 개방지역으로 선정한다.

  하지만 상하이는 여전히 중국 경제의 중심이었다.  상하이의 경제력은 다시 상하이를 개혁.개방의 중심으로 옮겨놓는다.  그 과정은 장쩌민(江澤民)의 등장과 연결된다.  오늘날 상하이방의 총수로 떠오른 장쩌민은 철저하게 상하이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등장은 도전이 아닌 '순종'이 원동력이었다.

  1989년 베이징을 강타한 톈안먼(天安門) 사태.  시위대에 동정적이었던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총리가 덩샤오핑의 분노 속에 물러나는 등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가 밀려온다.

  전 세계의 시선은 이제 중국 최대도시 상하이에 몰려있다.  상하이가 동요할 경우 덩샤오핑도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국면이 전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하이는 조용했다.  그 이면에는 상하이를 장악하고 있던 장쩌민이 있었다.  그는 철저하게 `비정치'의 노선을 고수한다.

경제만을 챙기면서 상하이 발전에만 주력했다.  그런 그를 덩샤오핑이 선택했다.  장쩌민을 따라 상하이 세력들이 중앙 무대에 등장한다.  이른바 상하이방(上海幇)이 만들어진 것이다.

상하이방은 서서히 베이징 정가를 장악해 나간다.  베이징의 세력들은 당연히 이들을 경계했다. 당시 베이징방의 대표인 천시퉁(陳希同) 당시 베이징 당서기가 장쩌민에게 공개적으로 대든 것은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상하이방은 주룽지(朱鎔基)라는 당대의 영웅의 가세로 권력 장악에 쐐기를 박는다.  1993년 공산당 최대 횡령사건을 맡은 주룽지는 천시퉁을 주범으로 적발해 냈다.  천시퉁은 결국 16년형을 선고 받고 감옥으로 향했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이제 후진타오(胡錦濤)를 정점으로 한 새로운 지도부가 등장했다.  후진타오는 베이징의 칭화대를 중심으로 한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의 거두다.

  지난 2003년 국가 주석에 오른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물밑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중국 정치 분석가들의 최고 관심사가 된 지 오래다.  돈과 권력을 모두 장악한 상하이의 힘을 후진타오가 모를리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여러 정보통들에 의하면 후진타오는 '상하이방의 황태자'로 불리는 천량위(陳良宇)를 제거하기 위해 칼을 꺼냈다고 한다.  천량위는 상하이 시당서기다.  과거 천시퉁과 같은 인물이다.  상하이방에 앞서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를 선택한 셈이다.

  후진타오는 천량위 자리에 칭화대 후배이자 자신의 권력 기반인 공청 출신인 류옌둥(劉延東.여) 당 통일전선부장을 밀고 있다는 후문이다.

  지난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16기 중앙위원회 제 5차 전체회의(16기5中全會)에서 한때 천량위의 교체가 가시화될 것이라는 외국 언론보도가 있었지만 천량위는 여전히 현직을 유지하고 있다.

  현지 외교소식통은 "후진타오 시대의 중국은 과거 유혈로 점철됐던 권력이양과는 다른 평화적 정권교체가 주요 특징"이라면서 "천량위 문제도 가급적 명분과 절차가 존중되는 가운데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여전히 상하이방이 공산당 핵심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에 대거 포진해있는 만큼 후진타오가 결코 무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상하이의 중요성을  잘 아는 만큼 자신의 의지를 반드시 관철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야흐로 베이징과 상하이의 '최후의 결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위클리홍콩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12-0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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